오늘도 무언가를 갈망하고, 짓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
나는 소원이 꼭 ‘직업’의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또 당첨, 세계 여행, 장기 봉사, 버킷리스트 실현, 내 집 마련…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든, 어떤 경험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위시리스트, 꿈의 장바구니에 담길 자격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오늘, 조금 더 장기적인 소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우리는 누구나
‘나의 무언가가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효용을 만들어내길’
혹은 ‘내가 만든 것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갖길’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갈망하게 만드는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갖고 산다.
어릴 때 나는 ‘~원, ~사’로 끝나는 직업보다
‘작’으로 시작하는 직업이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작가, 작곡가, 작사가.
자기만의 세계를 산고의 고통을 통해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나 통역가도 ‘세계의 건너편을 이어주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교사도 되고 싶었고, 아나운서도 되고 싶었고,
허준을 보며 명의가 되고 싶어 한 적도 있다.
명절마다 큰어른들께 안마를 해드리면 “기가 막히다”는 칭찬을 듣곤 했고
그 덕에 ‘줄을 서시오’를 외치는 안마사나 한의사가
참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는 외교관, 아나운서.
그 이후엔 패션 디자이너가 또 그렇게 멋져 보였다.
이 직업들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효용을 준다는 것.
그리고 그 효용이 다시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좋게 만든다는 것.
성인이 되어 내가 밟아온 길도 그렇다.
교사, 창업가, 디자이너, 그리고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어간
의약 연구의 세계.
막상 그곳에 들어가 보니
‘남을 살리기 전에 나부터 살자’는 마음이 들었고,
그 정도로 마음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방법’을 찾고 싶어졌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세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렇게 음악이 찾아왔고, 춤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낯선 타지에서 나를 버티게 한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확신에 이르렀다.
가능하면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남기는 일’을 하고 싶다.
음악처럼, 춤처럼, 디지털 디자인처럼.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며, 흔적은 남되 폐기물은 남기지 않는 일.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늘 누군가에게 효용을 주는 방식이었다.
다만 레이어의 순서가 다를 뿐이었다.
사람은 하나의 ‘알’처럼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포토샵의 레이어처럼 섬세하고 다층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레이어는 진하게, 어떤 레이어는 희미하게,
주인장의 마음에 따라 드러내거나 감추거나 하면서
자신만의 프레임을 완성해가는 존재.
내 안의 레이어 중 하나는 ‘피를 믿는 힘’이었다.
음악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내가 음악을? 음대도 안 나왔는데?”
춤을 가르칠 때마다
“내가?”
라는 자기 의심이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문득,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 보았다.
외가에는 이미 뛰어난 예체능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테너인 사촌오빠, 발레리나인 사촌언니,
그리고 현직 야구선수인 사촌동생까지.
타고난 피지컬과 감각은 이미 조용히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관심이 없어 스위치를 켜지 않았을 뿐.
이제는 로그인만 하면 된다.
이 믿음이 생기기까지
내 안에는 수많은 의심이 향처럼 피어올랐고
그 재를 쓸어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이제는 믿어보기로 했다.
옆동네 과수원을 부러워하는 대신
내 과수원을 차근차근 가꾸는 일에 집중하기로.
어떤 열매가 맺힐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 걸까?
오늘 필요한 햇살과 물을 주면 그뿐이다.
사랑하는 나의 열매를 기다리며
주어진 시간들을 성실하게 꾸리는 삶.
결국 꿈을 좇는 일은
농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옆집 농부, 뒷집 농부,
올해 농사도 다들 수고 많았고
내년도 잘해봅시다.
그래야 품앗이도 하고, 장터도 나가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중간중간 파전과 막걸리도 나눠먹고,
동네 축제도 한 번 여는 것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