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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Feb 27. 2023

개구리도 아프지 않은 말

힘내라는 말보다 위로를 주는 말에 대한 고찰 

무심코 던진 말에

개구리도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다.

개구리가 죽지 않는 말, 개구리에게 아프지 않은 말이

우릴 살아가게 하는 것은 아닐까.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하니?"

어렸을 적,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너는 꿈이 뭐니"라며 너란 녀석은 뭐가 되려고 하냐는 말.

그 선생님껜 아무 의미 없는 말일 수 있지만, 개구리에겐 몸에 던져진 돌멩이었다. 어린 나에게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좌절감을 주었다. 어렸을 때 숱하게 들었던, "네 부모님은 ㅇㅇ이신대, 너는 왜 그렇니"라는 말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말들이 너무 아팠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장난스러울 수 있는 나이에도 부모님의 직업에 의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어른들은 나에게 부모님만큼의 기준의 도덕적 행동을 요구했다. 나에게는 여전히 그것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아이에게 던지는 말이,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아이가 꿈을 꾸는데 세상을 바라보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몸으로 체감했다. 실제로 나에게 던져진 말들로 나는 세상에 나오지 못한 때도 있었고, 세상을 다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많이 해준다. 다 괜찮다고, 우리의 어떤 행위가, 행동이 우리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가 힘들 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괜찮다"였으니까.


돼지라는 말 

"돼지"라고 놀림을 받던 말도 나에겐 상처가 되어, 돼지가 아니기 위해 굶고, 토하며 괴로운 식이장애를 앓아야만 했다. 위에서 말했듯, 누군가에겐 장난일지 몰라도, 그걸 당하는 사람에겐 장난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곤 한다. 나에겐 굶는 것, 마르는 것, 살이 빠지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라야, 살이 빠져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았고, "너는 돼지야."라고 말하며 나를 놀렸다. 돼지가 아니기 위해, 사람이라는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던 날들이 나에겐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모르다. '장난'일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모든 삶을 통틀어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상처였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모르고 하는 말들, 얼마나 많은 이를 갉아먹고,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지 모른다. 던진 말의 무게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잘 쓴다는 말

나는 내가 잘한다는 감각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라는 말이 지배적으로 나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잘한다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하기도 하고, 나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럴 때마다 "잘한다"는 말은 때론 버겁기도 했고, 그럼에도 나를 존재하게 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닐 때는 교수님들이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나의 글에는 아픔과도 버금가는 '깊이'가 있다는 말. 그리고 내 글에는 감동이 있다는 말. 그래서 너의 글을 책으로 읽고 싶다는 말, 이런 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의 글에게, 다시 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곤 했다. 그리고 최근에도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고 나면 그래도 헛, 쓰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도문을 썼을 때는, 모두가 나의 기도문에 감동을 받았다는 칭찬을 해주었다.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다시 되새기고 되새기는 이유는, 그래야만 내가 이 쓰는 행위를 놓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스스로의 글에 자신이 없기도 하고. 요즘 나에게 닥친 위기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다. 네가 이 일을 맡아서 잘 해낼 거라고 믿는 믿음이 너무 부담감이 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도망치고만 있어서 글을 쓰는 것도 두려운 이 순간에 날 붙잡으려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는, 잘 쓰고 있다는 말은 어쩌면 이런 나라도 괜찮다는 말이 아닐까. '힘내'라는 말이 더 괴로울 땐 말이다. 이런 말들을 복기한 것은, 나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속하기 위한 동력이 떨어져서, 지푸라기라도 집는 심정으로 잡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버텨내지 않을까.


"저 개는 늑대가 아니에요"

멈뭄이는, 믹스견이고 거친 야생견을 닮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멈뭄이를 보고 "늑대다"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엄마, 저게 늑대예요?"라고 묻는 물음까지도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늑대'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이지만, 가끔은 마음에 무겁게 다가올 때가 있다. 멈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작고 귀엽고, 품종견이었다고 해도 '늑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멈뭄이와 산책할 때 한 엄마가 아이에게 "저 개는 늑대 같다."라고 했더니 그 아이가 말했다. "아녜요! 저 개는 늑대가 아녜요. 늑대는 더 크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 말이 너무나도 고맙고. 그 말에 감동을 했다. 그래 늑대가 아닌데, 멈뭄이는 늑대보다 작은데. 아주 당연한 거지만, 그 말이 왜 이렇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늑대'라는 말들이 숱하게 던져지는 세상에서 '늑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받을 때 그때만큼 감동적인 순간은 없을 거다. 오로지 나를 '나'로, '개'로 불러주는 말이 너무나도 힘이 되었다. 최근에 초등학생 아이들이 멈뭄이를 보고 '늑대새끼'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땐 또 가슴이 아팠는데, 어찌 됐든 '늑대가 아니라고 해준 말' 때문에 우린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다. 


개구리가 (혹시라도 맞는다고 하면, 던져진다고 해도) 아프지 않은 말,

존재를 존재로서 살게 하는 말,

그런 말들로 "할 수 없다"는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야"라는 것으로부터

나를 우리를, 지켜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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