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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나숙자 Dec 20. 2024

귀촌일기

글 한 줄의 마술

잠결에도 침 삼킴이 부드럽지 않았다.

서야 그 흔한 목도리도 두르지 않고 텃밭에 나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잠깐 배추하나 뽑아 오겠다고 텃밭으로 나갔던 것인데 겨울 햇살이 너무 맑고 쨍해서 배추 하나 뽑아 들고 바로 돌아서기에는 아까웠을 것이다. 해서 김장하고 남은 배추 몇 포기를 새들이 쪼아 먹지 못하게 흰 부직포로 덮어주고, 또 누워 있는 배추 쪼가리들 모아다가 닭장에 던져주는 일까지 기분 좋게 하고 돌아서는데  뭔가 조짐이 안 좋았다. 미처 감싸지도 못한 내 목을 찬바람에 고스란히 노출시켰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햇볕에게 인사도 못하고 서둘러 뽑아둔 배추를 들고 줄행랑을 쳤지만, 이미 내 목과 머리는 찬바람에 접수된 뒤였다.


열흘째 글쎄 집안에 콕 틀어박혀 내 정원 한 번 둘러보지 못하면서 우울하게 지내다가 햇살의 꼬드김으로 겨우 이삼십 분 텃밭놀이를 한 것뿐인데 그걸 못 참고 아우성을 치는 내 몸이 참 얄미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미우나 고우나 내 몸인걸.


밤사이 불편했던 몸을 일으켜 이른 아침을 먹고는 항생제를 포함한 알약 다섯 알을 서둘러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또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누워서 멍 때리다가 무심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책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고 펼쳤다. 짧은 시 하나가 내 묵직한 몸을 한결 부드럽게 다.

물컵보다 조금 작은  비닐 화분에
팬지꽃 한 포기를 얻어
작업장 창턱에 올려놓았습니다.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 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 되는 흙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러웠습니다.

신영복 '한 송이 팬지 꽃이 부끄럽다.'

고 신영복교수님이 감옥에서 쓴 '한 송이 팬지꽃이 부끄럽다.'는 제목의 짧은 시가 우울한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시에서는,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는 있지만 내 삶을 통틀어 한 송이의 꽃이라도 피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서려있지만, 난 보잘것없고 하찮은 꽃일지언정 어떻게든 꽃대 하나 올리고 싶다는 의지를 불러와 앉혔다. 그랬더니 우울했던 내 마음이 마법처럼 서서히 사라져 간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서 우울하고, 또 마음이 우울하면 몸도 따라서 찌뿌둥할 때가 많다.

그럴 때 한 줄의 글이나 한마디의 말이 독한 약보다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동화작가 정채봉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내 아픈 몸과 우울한 마음을 한꺼번에 위로하신다.

아우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인생에 왜 고통이 따릅니까?"
형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다.
"햇볕만 쨍쨍 쬐이면 사막이 된다."

이 글귀 하나로 오늘 하루 거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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