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가꾸는 사람입니다

겨울 잔디 예찬

by 꼼지 나숙자

대부분의 겨울 정원은 화사한 봄 색깔에 무채색을 섞어 놓은 것처럼 묵직하고 불투명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엽수는 물론이거니와 소나무나 문그로우 같은 침엽수들조차도 활력 없는 노인처럼 우중충한 빛을 띤다.


이처럼 둡고 썰렁한 울 분위기 싫어서 초부터 나는 마당에 잔디를 심었을 것이다.

예측한 대로 마당을 뒤덮고 있는 갈빛의 잔디는 겨울정원을 변화시켰다.


앙상한 나목이며 색 바랜 소나무가 그저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서있다고 상상해 보라. 옷이라도 입혀줘야 할 것 같은 추위가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갈빛잔디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다면 어떨도 상상해 보라. 뭔가 보호받는 느낌에 온기가 느껴질 것이다.

살아있는 나무뿐만이 아니 겨울이면 가릴 것 없는 돌탑이나 항아리와 같은 조형물들도 실 잔디와 함께 어우러지면 자태가 폼나서 굳이 눈이 없는 겨울이라 하더라도 꽤 멋스럽다. 심지어 붉은 단풍으로 치장한 남천이나 홍가시까지도 잔디 덕을 보게 되면 그것들의 미모뿐만 아니라 정원의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확 달라진다.

이처럼 갈빛잔디는 겨울정원 식구들을 돋보이게 하고 또 마당이나 나무에게 따뜻한 준다.

나는 잔디 예찬론자다. 특히 갈빛 잔디를 찬미한다.

잔디는 연둣빛일 때나 갈빛일 때나 다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굳이 내가 마른 갈빛 잔디를 찬미한 이유는 온 대지가 볼거리 하나 없는 묵직한 회색풍경일 때, 겨울을 따뜻하게 하면서도 평화롭게 변주하는 잔디의 모습이 그저 경이롭기 때문이다.

어느 햇살 좋은 겨울이었다. 우리 집 데크마루에 서서 정원을 지켜보던 서울 친구가 "겨울인데도 정원이 그다지 썰렁하지 않네. 남쪽이라 그런가?" 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잔디 때문일 거야. 저 갈빛 잔디를 좀 봐.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텅 빈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모습, 저것이 바로 땅을 따뜻하게 하고, 주변 애들까지 돋보이게 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까지 녹여주는 것 아니겠니."

그렇다. 겨울 잔디는 땅을 감싸주면서 시선을 따뜻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온기가 있다.

수분 없이 갈빛으로 물든 잔디가 고양이 털 같은 부드러움과 평온한 얼굴빛으로 정원 마당을 꽉 채운 모습을 상상해 보라. 누가 감히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또 갈빛 잔디는 정원의 꽃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무에 상고대가 허옇게 피는 날, 새벽빛에 반짝이는 갈빛 잔디는 그야말로 영롱한 눈꽃이다. 이처럼 정원의 꽃들이 부재중일 때 갈빛 잔디는 꽃을 대신해서 정원지기를 자꾸 웃게 하는 겨울정원의 꽃이다. 갈빛 잔디가 이럴진대 푸른 잔디는 말해 뭘 하겠는가? 잔디는 스스로도 아름답고 멋스럽지만, 무엇보다 자기 주변을 먼저 정갈하게 하는 겸손함이 있어서 더 정이가고 미덥다.

그렇다면 잔디가 이처럼 사랑스러운 점만 가지고 있을까?

아무리 좋은 사람도 백퍼 맘에 들 수 없듯이 잔디도 마찬가지다.

때를 맞춰 잡초를 뽑아줘야 하고, 또 벅머리가 되기 전에 자주 깎아줘야 하는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곁에 둘 수밖에.

더구나 겨울 잔디는 성장을 멈춘 상태라 여름처럼 일주일에 한 번꼴로 깎아줘야 하는 부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스럽다.


어쨌거나 난 잔디를 사계절 정원 디자이너로 꼽고, 잔디 만한 꽃 없다며 앞으로 쭈욱 잔디 손을 들어 것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비가 내렸다가 눈발이 날리고, 또 그러다가 해가 살짝 비치는 그야말로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예측불허의 날에 저 갈빛잔디가 없었으면 날씨만큼 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위로는 꼭 사람에게서만 오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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