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 다시보기
일주일 안에 친해지는 현대미술 (화요일)
1840년대 사진의 등장으로 회화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앞 장에서 살펴본 인상주의가 그중 하나였으며, 시각적 재현에서 벗어나려는 이러한 흐름은 추상미술의 전개로 이어진다.
추상미술의 등장은 회화 자체 내에서 발생하고 있던 변화와 관계가 깊다. 외부 세계를 충실히 재현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벗어난 화가들이 주관적 감정과 내적인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전환을 시도한 인물이 바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다. 그는 외부 세계의 대상을 화면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순수한 색채와 선율, 형태만으로 그림을 구성했다. 음악이 구체적 대상을 묘사하지 않고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듯, 회화도 재현을 넘어 독립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칸딘스키는 직접 추상 회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저술들을 통해 ‘추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남겼다. 특히 그가 저술한 『점·선·면(Punkt und Linie zu Fläche)』은 1926년에 출간된 이론서로, 추상미술의 형식적 요소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중요한 저서이다. 『점·선·면』에 앞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에서는 추상미술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칸딘스키에 따르면, 미술가는 선택권을 가진다. ‘위대한 리얼리즘’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추상’의 길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술이 정신적인 것을 소유하는 한, 추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칸딘스키의 주장이다. 그는 추상미술이 내적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칸딘스키는 회화적인 형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마음에 두어야 할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개별적인 형태의 창조였다.
이 책에서 칸딘스키는 회화가 곧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의존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리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더 이상 외부 세계를 단순히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색채와 형태 자체가 하나의 내적 울림을 만들어내며, 음악처럼 영혼을 흔드는 힘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색채를 음표에, 형태를 선율에 비유하며 회화가 ‘보이는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칸딘스키의 그림은 이미 추상주의가 나타난 모습이 두드러진다. <구성 Ⅵ>(1913)을 보면 그림의 색채와 형태가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이 나타난다. 요동치는 색채의 한가운데에 분홍색 반점들이 캔버스 위로 흩어져 있어 극적인 장면을 완화시키고 다른 화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칸딘스키가 이 작품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서로 대립하는 두 힘, 즉 파괴와 평정을 어떻게 포착하여 균형을 이루는가였다.
“객관적으로 표현해 볼 때 굉장한 붕괴감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만약 그것을 소리라고 본다면, 파괴된 세계 위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노래, 즉 생명력 넘치는 찬가이다.”
- 바실리 칸딘스키
결국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단순한 미술 이론서가 아니라, 회화가 정신적 차원에서 독립적인 예술로 거듭날 수 있다는 선언문이었다. 이로써 추상미술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을 넘어, 20세기 현대미술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칸딘스키는 점과 선, 면이라는 기초적인 조형 요소들이 어떻게 감정, 리듬, 내적 울림(inner necessity)을 만들어내는지를 분석했다. 그가 말하는 점·선·면은 단순한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 정신적·정서적 에너지를 지닌 표현 수단이었다.
이 책은 서론과 부록을 제외하고 크게 ‘점’, ‘선’, ‘면’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칸딘스키에게서 ‘점’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자 시작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었다. 점은 최고의 간결함과 최대한의 억제된 표현을 의미하며, 침묵과 언어표현의 최고이자, 하나의 결합을 의미한다.
칸딘스키에 따르면, 점은 사실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무한히 다양한 형상을 취할 수 있다. 즉, 점의 둥그런 형태는 아주 미세한 톱니 모양의 가장자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점은 찢어진 것 같은 울퉁불퉁한 가장자리에서 뾰족하게 보일 수도 있고, 반대로 대범하고 둥그스름하게 보일 수도 있으며, 서로 상이한 관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칸딘스키의 분석이었다. 즉, 점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다음으로 ‘선’은 일반적으로 묘사의 기본 단위로서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되거나, 대상, 색채, 음영 따위의 배열을 통하여 안정된 화면을 구성해내는 것을 돕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선’은 ‘점’이 움직여 나간 흔적, 다시 말해 점이 만들어 낸 소산이다.
이처럼 ‘선’은 ‘점’의 움직임에서 생겨난 것이다. 칸딘스키는 선을 ‘점의 운동으로 생기는 동적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동적인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운동의 방향을 나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움직이고 변하는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색과 함께 꼭 필요한 요소이다.
‘선’은 추상회화를 표현함에 있어서 주관적인 감정 상태나 감흥을 암시하는 데 효과적이다. 특히 칸딘스키는 선을 정신적인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선의 방향은 감정상의 온도를 가지고 있으며, 무한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면’은 ‘기초 평면’이라고도 불린다. 기초 평면이란 작품의 내용을 담는 물질적인 면을 의미한다. 기초 평면은 두 개의 수평선과 두 개의 수직선에 의해서 한계 지워지고, 이렇게 구획됨으로써 주변 영역에서 자립적인 본질로 표현되고 있다.
두 개의 수평선과 두 개의 수직선에 의해 생긴 기초 평면은 네 개의 변을 지니고 있다. 기초 평면의 가장 객관적인 형태는 ‘정방형’이다. 이 정방형은 두 쌍의 선이 동일한 힘의 울림을 준다. 칸딘스키가 보기에 정방형은 따뜻함과 차가움의 균형을 이룬다.
기초 평면의 네 개의 변 중 두 개의 수평선은 영구적으로 고정된 관계를 맺는 위쪽과 아래쪽에 위치하고, 두 개의 수직선은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한다. ‘위’는 여유 있는 유연성, 경쾌감, 해방감, 자유를 일깨웠으며, 위쪽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느낌이 고조된다. ‘아래’는 농밀함, 무거운 중량감, 묶여 있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 칸딘스키의 분석이었다.
다음으로 ‘왼쪽’은 한층 더 얽매이지 않은 해방감을 주며, ‘오른쪽’은 어느 정도 ‘아래’의 연속, 즉 동일한 완화를 지닌 연속으로 작용한다. 이때 ‘왼쪽’을 향한다는 것, 밖으로 나감은 먼 곳으로 향한 움직임을 나타내며, ‘오른쪽’을 향한다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이다. 즉, ‘오른쪽’에 가까워질수록 ‘휴식’의 에너지가 강하게 작용해 움직임은 지치고 느려진다.
칸딘스키의 이러한 분석은 형태에 우주의 기쁨과 삶을 담고자 한 시도였다. 그의 형태는 그것이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일지라도 내적인 방향을 갖게 마련이었으며, 그 형태와 동일한 성질의 정신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 『점·선·면』 책의 부록에 나와 있는 작품 감상의 예도 함께 살펴보자.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슬쩍 스쳐 지나가며 보는 것이 아니라, 조형요소들을 의식하고 감지해볼 것을 제안한다. 첫눈에 탁 띄는 위치로부터 시작해도 좋고, 고정된 출발점 없이 자유롭게 시선을 배회하면서 한 부분 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파악해도 좋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보면 흑색의 대각선, 적색·황색의 삼각형, 바둑판 무늬, 작은 점들, 정사각형, 반원형, 뾰족한 끝 등이 보인다. 수많은 형태와 색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하나의 흑색 대각선이 있다고 결론을 내려버려서는 안 된다. 이 선은 위쪽으로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으며, 오른쪽 위에서는 뾰족해졌지만 아랫부분 끝에서는 뭉툭하게 잘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딘스키는 각각의 형태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라고 제안한다.
우리의 시각을 이동시키면, 한 형태의 표현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우리의 시각을 이동시키더라도 여러 부분들의 연관성이 변화하지 않은 채 유지된다면, 전체적인 형태의 복합체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칸딘스키의 『점·선·면』은 단순히 추상미술을 위한 해설서가 아니라, 우리가 회화를 새롭게 경험하는 방법을 제시한 안내서이다. 그는 점과 선, 면 같은 가장 단순한 조형 요소를 감정과 리듬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언어라고 보았다. 칸딘스키의 유산 덕에 회화는 외부 세계의 모방을 넘어 인간 내면과 우주의 질서를 탐구하는 철학적 행위로 확장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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