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천재 예술가의 탄생
일주일 안에 친해지는 현대미술 (수요일)
현대미술을 볼 때 작품 정보보다는 작가 이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어떤 작품인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누가 그렸는가’라는 사실이다. 미술이 형식 실험을 넘어 작가 개인의 서명과 신화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기 시작하면서 현대미술은 작품 그 자체보다 작가라는 인물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근대 이전의 전통 미술에서는 종교, 역사, 신화와 같이 작품의 주제가 거의 정해져 있었고,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었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품의 뒤에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현대미술이 등장한 이후에는 작품 자체보다 작가의 의도와 개성, 철학이 강조되면서 ‘작가’가 전면에 등장했다.
‘예술가’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아마도 고독한 작업실에서 몰두하는 천재, 사회와 불화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인물일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르네상스 이후 서서히 만들어졌지만, 20세기 현대미술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굳어졌다. 특히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예술로 치환되는 ‘신화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전환의 계기가 된 기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Armory Show)’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뉴욕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전시이기 때문이다.
‘아모리 쇼’는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미술전이다. 1913년 열린 《모던 아트의 국제 전시(International Exhibition of Modern Art)》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당시 전시가 렉싱턴 에비뉴에 위치한 69기 무기창고(Armory)에서 열렸기 때문에 장소 이름을 따서 ‘아모리 쇼’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던 아트의 국제 전시》는 미국 미술의 역사상 중요한 전시 중 하나로 꼽힌다. 1911년 미국의 미술가들은 당시 보수적인 미술계에 대항해 화가와 조각가들이 모여 협회(AAPS)를 설립했고, 급변하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담은 새로운 미술을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특히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했기 때문에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움직임이 필요했다.
협회가 주축이 되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협회장이었던 아서 데이비스(Arthur Davies)는 1912년 독일 쾰른에서 열린 《존더분트 국제전시회》를 보게 된다. 이 전시회는 규모도 컸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의 대중들에게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미술 사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반 고흐, 에드바르 뭉크 등의 그림이 출품된 이 전시에서 데이비스는 “내가 원하는 전시회가 바로 이것”이라며 전시회 기획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협회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전시가 《존더분트 전시회》를 비롯한 유럽의 전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전시 기획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20세기 초 미국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과 더불어 이를 대중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데이비스를 비롯한 기획자들은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과 미국 미술을 함께 선보이는 전략을 채택했다.
1913년 2월 드디어 막을 올린 첫 《아모리 쇼》에는 1,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소개되었다. 전시된 작품은 2/3 이상이 미국 예술가들의 것이었다. 당시 미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통해 미국의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 형성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아모리 쇼》에서 대중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유럽의 모더니즘 예술 작품이었다. 특히 ‘입체주의(큐비즘)’에 많은 관심이 쏠렸는데, 강렬한 원색과 형태의 왜곡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발 디딜 틈 없이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여성의 모습을 해체시키고 파편화시켜서 표현한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시각을 한 화면에 담아내면서 역동성과 속도 감각까지도 부여하고 있다.
“여성의 얼굴 표정을 짐작할 수 없고, 형태도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림임에는 틀림없다.” -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에 대해 비평가들은 혹평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아모리 쇼》는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전시 기간에도 8만 7천 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또한 전시회 기간 동안 174점의 작품이 판매되었다.
문제는 미국 미술을 보여주려던 전시 기획 의도와 달리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는 것이었다. 전시 조직 위원이던 윌리엄 글랙큰스는 “우리의 미술 중 가치 있는 것은 모두 프랑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국민 특유의 미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라고 인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미술을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지금에야 현대미술 하면 가장 먼저 미국이 떠오르지만, 오랫동안 문화예술의 중심지는 유럽이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단순히 정치·경제적 강대국을 넘어 문화예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복구에 여념이 없을 시기에 미국은 정부가 나서 문화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해외의 미술 작품을 수입할 때 면세 혜택을 주고, 비영리 재단의 기부자들에게 소득세를 면제해주어 JP 모건과 같은 자산가들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했다.
1930년대 들어 미국은 대공황으로 침체를 맞게 되지만, 뉴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경제 불황에도 미술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 말에 뉴욕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휘트니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금세기 미술 화랑 등이 개관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1929년에 문을 열었다. 미국인들은 유럽 중심의 질서를 재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유럽의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탐구했고, 그 결실이 MoMA의 개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모마의 초대 관장은 알프레드 바 주니어(Alfred H. Barr Jr.)가 맡았다. 유럽 현대미술에서 미국 미술을 방대하게 아우르는 영구적인 공공미술관의 설립을 선언하며 출범했다. 첫 전시는 《세잔, 고갱, 쇠라, 반 고흐》였다.
바 주니어는 관장으로 임명되면서 미술관의 방향과 정책에 대한 기본안을 요청받았다. 27살의 젊은 나이었던 그는 다매체적인 미술관을 구상하였고, 포용적이면서도 종합적인 미술관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회화, 조각, 판화와 드로잉, 상업미술, 산업미술(포스터, 광고, 레이아웃, 포장), 영화, 연극 디자인(미술과 의상), 사진, 그리고 도서관의 책, 사진, 슬라이드, 그리고 컬러 복제품들”을 포괄하겠다고 선언했다.
바 주니어는 미술관을 구상하던 당시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방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바우하우스를 진정한 모더니즘의 산실이라 여기며 유럽의 모더니즘을 섭렵하는 한편, 미국적 미술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가운데 열린 《큐비즘과 추상미술》(1936.3.2. ~ 4.19.) 전은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얼개를 제시하며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념비적 위상을 부여하게 된다.
어디선가 한 번쯤 봤을 듯한 이 다이어그램이 바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 전시 도록 표지에 실린 것이다. 추상미술의 전개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정리해 현대미술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도표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현대미술이 ‘추상으로 향하는 필연적 진화’라는 바 주니어의 신념을 시각화한 선언문이었다. 그는 일본 판화, 아프리카 조각, 기계 미학, 국제양식 건축 등 비서구적 영향과 현대적 흐름을 얽어내며, 결국 모든 길이 추상으로 이어진다는 계보도를 제시했다.
《큐비즘과 추상미술》 전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29년 개관 당시 목표로 삼았던 ‘유럽 모더니즘의 수용과 미국적 미술의 탄생’을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 주니어가 구상한 ‘다분과 계획(Multidepartmental Project)의 실현’이었다. 바 주니어의 그림을 보면, 유럽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 미국적 미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단초를 제시하고 있고, 여러 분과의 미술을 포괄하려는 의도를 포함한다.
《큐비즘과 추상미술》 전시는 단순한 기획전이 아니었다. 바 주니어가 제시한 도표와 함께, 이 전시는 현대미술을 하나의 진화론적 서사로 체계화한 사건이었다. 후기 인상주의에서 출발해 입체주의를 거쳐 결국 추상으로 나아가는 일직선의 계보는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 교과서적 서술로 자리 잡으며, 현대미술 이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도표는 지나치게 선형적이고 필연적인 진화 과정을 전제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모든 길이 추상으로 이어진다”는 바 주니어의 확신은, 다양한 미술의 흐름을 단일한 방향으로 묶어내려는 시도였다. 실제로 현대미술은 추상뿐 아니라 개념미술, 퍼포먼스, 사회참여적 예술 등으로 뻗어나갔다. 이 때문에 《큐비즘과 추상미술》 전시는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하나의 시각일 뿐, 절대적인 서술은 아니라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미국미술이 어떻게 체계화되고 제도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이 다이어그램은 미술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자료라기보다, MoMA가 세계 미술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야심과 전략을 담은 일종의 ‘미술사의 지도’였다. 오늘날에도 이 도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동시에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40년대에 미국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의 초현실주의다. 《아모리 쇼》에서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준 마르셀 뒤샹은 1913년 영구히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후 앙드레 브르통, 앙드레 마송,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 유럽의 미술가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본래 문학에서 온 용어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장 콕토의 무용극 <퍼레이드>가 리얼리즘을 초월한 진실, 즉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용어를 처음 쓴 것은 아폴리네르이지만, ‘초현실주의 운동’을 촉발한 인물로는 앙드레 브르통을 들 수 있다. 브르통은 자신과 친구들의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채택하면서 「초현실주의 선언」(1924)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길 갈망하는 새로운 표현형식에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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