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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의 이름은...

파나마 세비지 이리데센스 게이샤 카보닉 메서레이션 워시드 커피


서울의 일상은 퍼석하고 삭막하다.


지하철에 설치된 스크린도어마저 슬퍼 보인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탕후루 꼬챙이들처럼 사람들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퍼석하고 삭막하고 슬프고 날카롭고 뾰족한 이 도시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찾는 건 사실 꽤나 묘연한 일이다.


Panama Savage Iridescence Geisha Carbonic Maceration Washed.


어느 일요일 오후, 우연히 들린 카페의 메뉴판에 적혀있는 이 웅장한 커피의 이름을 보고 난 어떠한 감동을 느꼈다.


13,000원이라는 가격은 그 이름이 걸치고 있는 위엄에 걸맞은 가격처럼 보였다.



진주 강(姜), 모범 범 (範), 뛰어날 수(秀). 강범수.


1996년 5월 4일, 대한민국 서울시 강동구 성심병원에서 태어난 내가 받게 된 이름이다.


진주처럼 귀하고,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고 아빠는 어린 나에게 설명했다.


그때 아빠가 얘기했던 진주 강의 진주가 ‘pearl’의 진주가 아닌 강 씨 집안의 본관이 있는 경상남도 진주시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먼 훗날의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입안에 이름을 넣고 굴려봐도 촌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진주처럼 귀하다는 의미의 성씨도 뻥이었다니…


사실 내 이름을 지은 건 할아버지라고 한다. 유명한 작명소에 찾아가 받아온 비싼 이름이라나. 내 부모님은 원래 나의 이름으로 ‘시은’을 생각하셨다고 한다. 강시은. 이름의 뜻은 모르겠지만 어감은 훨씬 나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고 결국 그 이름은 내 사촌동생에게 돌아갔다.


그저 촌스럽기만 했다면 그럭저럭 강범수로 살아갔을 텐데 나의 이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영어로 읽으면 어감이 한층 더 괴상망측해진다. Beom Soo Kang. 아니 왜 이름이 이따구인 거냐고.


할아버지도, 그 용하다는 작명소의 누군가도 몰랐겠지. 이 이름이 지구 반대편 섬나라의 한 초등학교에서 불릴 줄은. 강범수가 비 옴-수-캉이 될 줄은… 매일 출석을 불러야 하는 선생님의 난제가 될 줄은…


그렇게 나의 이름은 여러 수난을 겪었다. 단 한 번도 강범수 또는 범수강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어쩔 땐 비 옴-수-캉. 어쩔 땐 붐수-캉. 어쩔 땐 뻬옴-쑤-캉. 엉덩이 또는 부랑자를 뜻하는 bum과 스펠링이 비슷해 이걸로도 한참 놀림받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원망의 화살은 할아버지를 말리지 못한 부모님에게로,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작명소를 찾아간 할아버지에게로, 용하다면서 영국으로 가게 될 내 운명을 예측하지 못한 작명소의 누군가에게로 날아갔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 내가 아는 이름 중 가장 발음이 쉬운 이름으로.


그렇게 강폴이라는 이름은 강범수보다 네 배는 더 긴 시간을 살게 됐다. 강범수는 부모님과 친척들에 의해 근근이 생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지은 강폴이라는 이름마저도 요즘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지. 강풀을 좋아해서 가명으로 지은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들은 때부터인 것 같다.


영국인에게 말하면 그래서 너의 진짜 이름은 뭔데?라는 반응. 한국인에게 말하면 넌 한국인처럼 생겼는데 왜 영어 이름…?이라는 반응. 전화로 미용실을 예약하고 찾아갔을 때 데스크에서 내 이름을 장펄 또는 강풀로 말할 때. 이 모든 순간들의 끝에서 요즘 난 이름을 다시 바꾸고 싶어졌다.


파나마 세비지 이리데센스 게이샤 카보닉 메서레이션 워시드 커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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