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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살청춘 지혜 May 22. 2022

위스키 온 더 락 (Whisky on the Rock)

흉내낼 수 없는 세월의 멋

https://youtu.be/qJxTH7DfpYY


해 꼬리가 길어졌다.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5월 하순의 하늘은 여전히 밝다.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리기 아쉽다는 듯 서쪽 해넘이에는 주홍빛 립스틱처럼 짙은 낙조가 긴 꼬리로 드리웠다. 하지만 이미 하늘의 주도권은 넘어갔다. 검푸르름이 짙은 동쪽 하늘엔  한낮의 열기를 빨아들인 보름달이 환하게 두둥실 떠올라 있다. 바지 주머니에 깊숙히 양손을 푹 찌르고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맨 체 고개를 뒤로 젖힌 반백의 그녀가 걷고 있다. 무겁게 끌리는 다리와 달리 뒤로 꺽인 뒷 모습이 마치 축 늘어진 주름살을 억지로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어색해 보인다.


늘상 보는 하늘이지만, 계절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볼 수있어 좋았다. 오늘같이 울적하고 기분이 꿀꿀한 날은 고개만 들면 언제나 볼 수있는 해와 달이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어디선가 아카시아꽃 향이 그녀의 목덜미와 얼굴을 스치고 갔다. 문득 여고 시절 초여름 밤공기에 섞여 있던 달콤한 향이 떠올랐다. 밤 10시 야간 자습을 끝내고 내려오던 길목에서 친구들과 수다 속에 품어 내던 아카시아 향. ‘추억은 나이를 먹지 않는구나!’ 꽉 다문 입가에 잠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세 사라졌다.


낯익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멀리서 노란빛 엘이디 조명으로 투영된 장미가 새겨진 검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cocktail bar, yellow rose!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일과를 마치고 약속 없는 날, 특히 오늘처럼 예후가 좋지 않은 환자들과 상담한 날엔 어김없이 들르곤 한다. 고풍스러운 두꺼운 유리 블록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확 안겨 오는 재즈 음악과 달콤하고 쌉싸름한 칵테일 향. 


앤틱한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20평 남짓 아담한 내부 한쪽 벽은 여러 종류의 술들이 진열되어 있고, 혼자서도 편하게 술을 마시고 갈 수 있도록 긴 라운지 테이블과 의자가 어서 와 앉으라는 듯 놓여있었다. 다크 쵸콜렛 같은 실내 어둠을 밝히기 위해 여기저기 켜둔 노란 촛불 조명이 따스했다. 더워진 실내 온도를 낮추기 위해 뿜어내는 에어컨의 냉기를 문득 피부로 느끼며 각의 따스함과 촉각의 차가움이라는 상반된 감각이 만든 이 쾌적함은 모순이 아닐까? 그녀는 스치듯 생각했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신 거 보니, 오늘은 온더록스로 위스키 한잔하셔야겠는데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늘 앉던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눈인사하며 지켜보던 제이가 말했다. 제이는 바텐더를 하며 yellow rose 칵테일 바를 직접 운영하는 30대 젊은 사장이다. 5년 전 이사 와서 아이들과 동네 탐색 겸 우연히 들른 것을 계기로 가족 단골이 되었다. 가게 구석구석 직접 정성껏 가꾸는 손길이나 고객 한 명 한 명의 상황과 기분을 살펴 잘 맞는 음료를 추천하고 대접하는 마음결이 보통의 술집 사장과 달랐다. 


“내가 ‘한’의사면 제이는 ‘술’의사야, 그치?” 


“저를 술의사라고 부르시다니, 영광입니다.” 제이가 웃으며 큰 사각 얼음이 담긴 크리스털 유리잔에 위스키 yellow rose를 내왔다. 목을 싸하게 쏘는 듯한 위스키만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넘김이 부드럽고 마지막 맛이 완전히 쓰지 않고 달콤하고 청량감이 있는 yellow rose를 그녀는 주로 온더록스로 마셨다. 주변 온도와 마시는 상황과 횟수에 따라 위스키 농도가 달라지기에 매 모금 처음 마시는 것처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인생도 온더록스로 살고 싶다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도 곁들여 먹을 치즈와 간단한 안주를 함께 준비해주는 제이는 섬세했다.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들어올 때부터 얼굴빛이 안 좋으시네요?” 조심스럽게 그가 물었다. “역시 술의사님!” 그녀가 두 모금째 위스키를 넘기고 마치 건배하듯 잔을 들었다. “오랫동안 봐오던 환우님이 최근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이번엔 다른 분이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어. 다행히 초기라 그나마 관리 잘하면 생명에 지장은 없겠는데, 절제 수술에 대해 논의하며 우시는 데 속상하더라고...” “에구~ 저런. 나이가 젊으시나요?” 제이도 자못 심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48. 아이가 어려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겠지. 몸은 마음 작용에 영향을 받는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관리하자고 상담해주긴 했지만, 마음이 허하네?”


“참, 막내 따님이 고등학생이지요?”


 그가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이들 데리고 여기 처음 탐방 왔을 때 막내가 중학생이었는데, 벌써 고3이야. 많이 키웠지? 1.2번은 이미 서울로 취직했고, 대학 간다 안간다 하던 셋째도 맘 잡고 공부하더니, 자신이 원하던 과에 합격해서 즐겁게 다니는 거 같아. 이제 막내만 대학 보내면 11년 입시생 학부모 노릇, 끝~~~!” 그녀가 위스키가 담긴 잔을 다시 들며 웃었다.


“와~ 부럽습니다. 저는 이제 삐약삐약 시작일 건데.... 미리 걱정스럽습니다.”     


진지하게 유리잔을 닦는 제이를 보며 문득 생각난 듯 그녀가 물었다. “맞다! 진희 씨 출산 예정일이 이번 달 말이지?” “네~ 첫 얘라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스럽고 그러네요?” “제이! 걱정은 하지 말고 설레기만 해. 진희 씨와 복덩이 건강하니, 무탈하게 순산할 거야.” 얼음이 더 녹을세라, 스트레이트로 마지막 남은 술을 들이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얼음이 녹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녹았다고 안달하지 말고  순간순간의 이 맛을 즐기면서 살아야지, 그렇지? 오늘은 여기까지!”


그녀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제이에게 건넸다. “복덩이 필요한 거 사는데 보태. 내가 주는 선물로 말야. 그리고 진희씨 출산하면 내게 알려줘. 진희씨 체질 아니, 산후에 바로 먹는 오로 약 지어줄게. 비싼 산후 보약은 제이가 지어 주고!” 제이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했다. “아뇨. 아뇨. 위해주시는 마음만 기쁘게 받을게요. 이대로도 감사해요.” 받지 않으려고 물러서는 제이의 손에 봉투를 꼬옥 쥐여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먼저 태어났던 사람이 아가에게 보내는 축하 선물이야.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받는 거야.” 여전히 쩔쩔매는 제이를 뒤로 하고 나오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 엘로우 로즈와 제이 덕분에 나도 심란한 마음 훌훌 털고, 이렇게 다시 일어서잖아? 고마워.” 들어올 때와 달리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제이는 촉촉이 젖은 눈길로 배웅하고 있었다. 



'나는 노래 못해.'란 자기 제한을 넘기 위해 최근에 노래 강습반에 등록했습니다. 첫 시간에  쌩목(^^;;)으로 음정 박자 저리 가라 노래하는 저를 보고 강사님이 목소리에 호흡을 입히는 연습하라고 권해준, 어른의 향기 가득한 '위스키 온 더 락 (Whisky on the Rock).' 


보드카와 위스키처럼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는 방법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섞지 않고 마시는 '스트레이트', 얼음을 채워서 마시는 '온더록스', 과일이나 다른 음료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


위스키 온 더 락 (Whisky on the Rock)은 위스키에 얼음을 채워서 마시는 방식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바위 위에 올린 위스키란 뜻인데, 여기서 온더락의 원래 뜻은 암초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배(좌초)의 상태로 좌절을 표현하는 단어로 영국에서는 처음 쓰였다고 해요. 이것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로 넘어오면서 투명한 다이아몬드(Lux)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 위에 위스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술도 잘 모르고 노래도 안 듣던 제가 이 곡에서 주는 분위기를 소화하기 위해 여러 번 들으며 상상의 글을 써 내려갑니다. 흉내낼 수 없는 세월의 멋이 뭘까? 멋지게 늙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5년뒤 위스키를 온더록스로 마시고 있는 나를 상상하면서....가사도 멋지고 들을수록 빠져드는 이 곡. 아마도 제18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 주 일요일엔 상상했던 것처럼 아이들 데리고 주변 탐방을 해봐야겠어요. 혹시 '술'의사 제이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요. 


여러분만의 '흉내낼 수 없는 세월의 멋'을 가지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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