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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Oct 28. 2021

/ 산 다녔던 사람

나의 산이 과거형으로 서술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없이 슬프다.

돌아보면 인생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고, 동시에 가장 찬란하기도 했던….


그 과거형의 이야기를 굳이 들춰내는 것이

잘 나갔던 한 시절의 기억을 반추하며 어디다 쓸 데도 없는 자아도취에 빠지고 싶어서인지,

"나 젊어서 이랬던 사람이야!" 식으로 나이 들어감의 서러움을 풀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 그야말로 수년 만에 소싯적 산악회 회장님, 산악회 동기 이렇게 셋이 만나

서울대입구역 치킨집에서 맥주를 잔뜩 마시고 돌아왔다.

4인 가족 전업주부인 나로서는 얼마나 오랜만의 나들이였던지, - 그것도 친목 도모 술자리 -

소주 한잔을 섞은 첫 500cc를 다 들이키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팍팍 돌더니,

화통 같은 아줌마 목소리로,

 


"형님!!! 우리가 산 다닐 땐 말이에요,

 그래도 산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구욧!!!"



그렇다. 이 코로나 시국에 투명 가림막 너머 옆 테이블 사람들이 비웃는 줄도 모르고 나는,

지금 산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없는 그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ㅋㅋ)


산에 대한 열정... 그것이야 말로 진실로 어디다 써 먹을 데도 없는 열정이었으나,

그것이 산을 접은 지 십수년이 지났어도 아직 산에서의 일들을 잊지 못하고,

이렇게 "다녔던" 사람이라고 허세를 부리면서까지 과거형의 산을 서술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렇게 "다녔던" 것 치고는 나의 산행 이력서에 몇 줄 쓸 말이 없다는 사실이

또 나를 슬프게 한다. 한없이 좋았던 기억은 한없이 좋았던 방식으로 짜맞추어지기에,

가끔은 나의 산 다녔던 기억들이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닌지, 너무 좋은 쪽으로 조작된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옛말도 있지 않던가.

산 다니는 사람과 낚시 하는 사람 말은 절대 믿지 말라고….

하물며 산 "다녔던" 사람 말은 오죽할까.


여하튼 지하철 쇠기둥에 기대어 1/4로 궁색하기 짝이 없게 접어 읽던 교차로 신문의 귀퉁이에서

어느 안내산악회의 광고를 보고, 무려 전화를 걸어 진안 마이산 종주산행을 예약한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고, 그 후로 이 안내산악회, 그 안내산악회, 저 안내산악회의 야간버스에 실려

이 산~, 그 산~, 저 산~, 

떠돌이처럼 돌아다녔던 것이 나의 산 이야기의 출발선 쯤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어차피 과거형인 이야기를 굳이 시간 순으로 나열할 필요가 있나.

"다녔던" 이력 중에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몇몇 기록을 뽑아 잘 다듬어두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 사람의 생에도 돌고 도는 것이 있어서 나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끝난 나의 산 이야기를 

항상 정리해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다.



산 다니던 시절은 아득하게 지나갔지만,

산은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형태로 나의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것은 내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할 것이기에

지나갔어도, 과거는 아닌 것이다.



이것이 좋았던 것들을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산에 가고 싶다. (애들 중학교만 보내놓고…ㅋㅋ)

어쩌면 그게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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