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 No-Show
계속된 면접으로 정신없는 와중, 1차 면접 합격 메일이 도착한다. 34번째 기업이다. 유명 식품 그룹 슈퍼마켓 사업부의 관리 직무, 합격 시 지방근무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1차 면접을 복기해보니, 그는 독서 경험을 중점적으로 어필했다. 보통 그가 면접을 볼 때, 면접관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독서보다는 워킹홀리데이 쪽이 더 컸다. 하지만 34번째 기업의 경우, 인상이 좋은 면접관이 그의 독서 경험에 크게 관심을 보였다. 자신을 알아준다는 생각에, 그는 독서 경험을 면접 내내 어필했다.
합격할지 여부는 의문이었으나, 34번째 기업은 그에게 1차 면접 합격 메일을 날렸다. 34번째 기업의 최종 면접 안내 메일에는, 사전 예고 없이 면접에 불참할 경우 훗날 서류 전형에서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 적혀있다. 그는 34번째 기업의 직무나 지방 근무가 썩 내키진 않지만, 주어진 최종 면접 기회는 놓치지 않고자 한다. 처음 생각은 그랬다.
그에게는 면접 안내 메일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해당 안내 메일들에는 여러 규모와 직무의 기업들이 섞여 있다. 그중에는 그가 정말 입사하고 싶은 기업도 있고, 합격하더라도 그다지 입사하고 싶지 않은 기업도 있다. 안타깝지만 34번째 기업은 후자에 속했다. 그가 보기에, 34번째 기업의 장점은 둘이다. 높고 커다란 사옥, 그리고 면접 때 본 면접관의 인상이 좋다는 것이다. 두 가지 장점 이외의 모든 것(직무, 시장의 성장성, 지방근무 등)은 그에게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래도 최종인데 가긴 가야지. 굳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가야지.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지만, 계속된 면접에 몸이 피로해지고, 단점들이 자꾸만 눈에 띈다. 면접에 참석하겠다는 결심이 흔들리자, 그의 몸도 따라서 풀어진다. 면접 당일, 그는 늦잠을 자버린다.
아침에 눈을 뜨니, 당장 출발하더라도 면접 시각에 맞출 수 없는 시간이다. 그의 입에서 욕이 나온다. 꼭 입사하고 싶은 기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늦게 일어난 자신을 자책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는 짜증스럽게 다시 자리에 눕는다.
시간이 지나도, 그는 자신의 풀어진 마음가짐으로 인해 일어난 이 사태가 부끄럽다. 면접 때 그가 했던 답변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느니,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 독서를 했다느니 하며 어필했던 그다. 그러한 독서 경험을 정리해서, 독서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독서를 열심히 했다는 그가, 실제 생활에서는 사전 예고도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른바 No-Show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 되었다.
유통업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서도, 책에 나와있던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차용하여 자신이 뭐라도 되는 마냥 답변했던 그다. 읽은 대로 술술, 그 자신도 놀라우리만치 포장이 잘 됐던 답변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약속은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착잡하다.
물론 인사팀이나 면접관 입장에서 그는, 불참하는 수많은 지원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스스로의 기준에 용납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럴 바엔, 최종 면접 안내 메일을 받았을 때 확실히 결정하고 답변을 주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가 34번째 기업에 다시 지원할 일은 없겠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굳이 적을 만들어버린 느낌이다.
약 일주일 뒤, 34번째 기업은 No-Show한 그에게도 결과 발표 메일을 보낸다. 그는 자신을 겨냥한, 향후 서류 지원에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따로 적혀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사팀의 내부 블랙리스트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으리라.
최종 면접 불합격
참석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불합격이다. 뭘 기대했던 건가. 그는 이 메일을 보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뜨끔한다. 누가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양심에서 오는 가책이다. 이후부터는 면접 참석 여부에 대해 결단을 빠르게 내리고, 참석하기로 결정한 면접에 대해서는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