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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윤상학 Aug 22. 2024

여름이 가고 있다.

어떤 헤어짐


잠자리에 든 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의 기운이 다르다. 무겁게 칙칙하게 온몸에 달라붙던 바람이 아니다. 한결 부드럽고 가볍고 상냥해졌다.


얼굴에서 팔로 손으로 다리로 온몸 부드럽게 남실남실 대며 춤을 춘다. 잠을 자기에 놓치기 싫은 기운의 밤바람이다.

자지 마, 함께 놀자며 속삭이는 바람의 귓속말에 가만히 눈을 떠본다.


창 밖 하늘은 고요히 침묵 속에 있다. 몇 억 광년 거리를 두고 있는 행성에서 오는 빛 몇 개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 행성의 누구도 지금 나처럼 누워서 부드러운 밤바람에 잠 설치며, 창밖 위 하늘 치어다볼까. 나랑 같은 생각을 하면서.


뭐 하세요. 거기도 올여름 많이 더웠나요. 여긴 이제 여름이 갈려고 하고 있어요.


종이 돌돌 말아 귀에 대고, 억만년 거리에 있는 누군가와 속삭이고픈 밤이다.


몸 뒤척일 때마다, 까끌까끌한 촉감과 시원함에 다가올 여름과의 헤어짐이 아쉬운 밤이다. 

 가득 받치고 있는 삼베요와 리넨 베갯잇, 아삭아삭한 시어서커 베갯잇. 그 깔끄러움과 시원함이 좋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남실대는 밤바람과 함께 여름이 주는 선물을 한껏 즐겨 본다.


얄상한 듯, 도타운 듯 홑겹으로 된 삼베 이불 주신 어머니, 그 밑에 깔아 둔 두꺼운 인견 이불 주신 셋째 시누 떠오르는, 추억과 함께하는 여름밤의 잠자리이다.


또 그 아래 깔아 둔 화문석 돗자리의 탄탄한 받침이 인견, 삼베로 이어져 그득 전해오는 서늘함, 화문석 구매한 탁월한 선택을, 고개 끄떡이며 칭찬하는, 너그러운 이다.


여름 시작을 알리던 풀벌레는 여전히 울고 있다.

나지막이 고요히 어둠을 뚫고 들려온다.

밤은 무르익고, 풀벌레 소리는 고요 속에 명료하다.

낯선 울음이 섞여 있다. 귀뚜라미 소리이다.

여름이 가고 있다. 가을에 밀려가고 있다.


그동안 고마웠어

작열하는 태양도 고마웠고, 두둥실 미동 없이 떠있던 하얀 솜구름도 고마웠고, 고성, 통영, 연화도, 욕지도로 바캉스 갈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고, 아득한 옛날 여름 바캉스의  레쓰비 캔커피 떠올리게 해 줘서 고마웠어.


푸르게 튼실하게 잎사귀 피어낸 나무들도 고마웠고, 눈밭같이 피어났던 샤스타데이지 꽃도 고마웠어.

파란 수국 꽃도 고마웠고, 주황색 해당화도 고마웠고, 바닐라 꽃분 배롱나무꽃도 고마웠고, 빨갛고 하얀 연꽃도 고마웠고, 해바라기도 고마웠어.


시원하게 내려줬던 소나기도 고마웠어. 

산책길 따라주던 풀벌레 소리도 고마웠어. 

시원한 수박도, 달콤한 황도도, 새콤달콤한 자두도 고마웠어.

살얼음 동동 띄운 냉면도, 구수한 콩국수도 맛볼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어.

삼복더위도 고마웠어. 덕분에 고요히  건강 챙기고, 마음 챙기는 하안거 할 수 있었어...


여름에 감사 인사 건네 보는  다정한 밤이다.


밤은 깊어가고, 바람은 쉴 새 없이 일렁이고,

독한 감기약에 취한 듯, 몽롱한 가운데 여름 풍경들이 꿈처럼 흘러간다.


   



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리퍼를 신고 재바르게 아파트  , 흐르는 하천변으로 달려간다. 급하다. 여름밤이 떠나고 있다.


까만 밤, 가로등 불 밝힌 산책길을 걷는다.

졸졸졸 물소리, 찌르르 찌르르, 또르르 또르르

풀벌레 소리 속에 걷는다.


물은 물대로 조용히 졸졸졸, 풀벌레는 풀벌레 대로 각자 자기음색과 발성으로 소리를 고 있다.

소프라노, 알토, 메조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베이스....

산책길 지치지 않고 합주 하며 따라온다.


강아지 앞세워 산책하는 사람이 오고 있다.

강아지는 쉴 새 없이 여기저기 풀밭에 콧등 들이밀며 흠흠거린다. 주인은 가만히 귀여운 녀석의 모습을 보고 기다려 준다.

강아지는 족할 때까지 작고 촉촉한 콧잔등으로 탐색하며 갈 것이고, 주인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사랑스러운 밤이다.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저녁 회식하고, 서둘러 귀가한 후 운동복 챙겨 입고 나왔으리라. 분명 하루하루, 매일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일 거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잊지 않고 달리는 걸 보면.

산책길에 자주 마주치는, 달려오는 청년을 보며 축복 보내보는 밤이다.


중년 부부가 나란히 저 앞서 걸어오고 있다. 산책 아닌 운동 걸음. 남자가 땀을 흘리는지, 여자가 남자 얼굴을 닦아 준다. 가까워져 오는 사람에 남사스러웠는지 멈칫하는 표정이다. 그냥 걸어가다 보였을 뿐인데, 괜히 미안해진다.

그러나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에 흐뭇해지는 밤이다.


까만 밤, 불 밝힌 가로등 아래 산책길

졸졸졸, 찌르르 찌르르, 또르르 또르르

막 가득 채우는 풀벌레 소리


여름밤 서정을 걷고 또 걷는다.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한다.

두어 걸음 내딛다 멈춰 선다.


하천 위, 가로 놓인 다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리 난간의 한 아래턱을 자리 잡고 앉는다.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다리 아래 흐르는 하천과 그 곁 나란히 나있는 산책길 내려다본다.

개 돌려 오른쪽, 왼쪽 둘러본다.


하늘엔 하얀 구름이 물감 번진  퍼져 있다.

다리 아래 물은 검게, 더러는 반짝이며 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고, 산책길엔 홀로, 또는 남녀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걸어가고 있다.

오른쪽 공원에선 사춘기 접어들었을 머슴애들의 변성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운동 기구를 끼고서 까불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너머로 중년 남녀 넷이 먹거리 펼쳐 , 담소를 나고 있다.

왼쪽 다리 한켠에선, 노년 초입에 들었을 남정네 둘이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런두런.....





계곡을 타고 내려와, 아파트 사이를 뚫고 온 바람은 강약  중간약, 느리게, 빠르게, 보통 빠르게를 쉼 없이 변주하며 몸을 훑고 있다. 얼굴을 훑고, 귓가를 훑고  머리카락을 훑고, 온몸을 훑 있다.


어둠은 깊이 내려 사위는 더욱 고요하고 까맣다.


모든 것들이 멈춘다. 정물이 된다.

까불대던 머슴도, 산책하던 남녀도, 담소 나누던 중년들도, 초로의 남정네들도, 흐르던 하천도, 불어대는 바람도 모두 정물이 된다.


졸졸, 찌르르 찌르르  또르르 또르르, 두런두런...


사위는 소리로 가득 차다.


정물하나, 둘 사라진다.

가득 채운 소리 속으로 모두 사라진다.

리만 살아있다. 소리마저 사라진다.

 나도 사라진다. 모두 사라진다.


다리 위인 듯. 앉아 있는 듯,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듯, 바람이 부는 듯, 을 꾸는 듯, 내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경계를 넘나드는 여름밤이다. 






남동향에서 뻗치는 아침 해의 기운이 한풀 꺾여 있다.

창문 넘어 무거운 몸짓으로 덮쳐오던 아침 바람도 엊저녁 밤바람처럼  한결 가벼워졌다. 더러는 살갗 찌르는 녀석도 섞여 있다.


주방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 단정원수도 여름을 지나고 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봄날에, 부드러운 연푸른 잎사귀 뾰족 고개 내밀며 세상 구경 나오더니, 찬란한 사오월 지나오며  튼실해진 잎사귀, 여름 맞아 무성해졌더랬는데..


한낮 설거지 하며, 눈으로 들어오는 잎사귀 무성한 정원수는  하늘 높이 뻗쳤던 열기 어느새 거두어 차분해졌고,

햇살은 잎사귀 위로 쇠잔해진 몸 뉘이고 있다.


쇳소리 내며 울어대는 매미시간에 역행하듯, 목청은 더욱 우렁차다. 기어코 짝을 찾고 말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해는 짧아졌고, 여름은 가고 있는 중이다. 매미는 분주하다




여름은 하나씩 흔적을 지워내.

름이 가고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오고 있다.


또 하나의 헤어짐이다.

또 하나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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