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의 우선순위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걸까? 우리는 죽음에서 삶을 되묻곤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회한 많은 삶을 반성한들 아쉬움만 남길뿐이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우선순위를 먼저 생각할 것.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해야 하는 일에 밀려 중요한 삶의 조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
일 때문에 하는 카톡대응을 하고 있을 때 초등학교 6학년 딸이 다가와 오늘 하루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알거린다. 종알거리다가 말이 없어졌다. 얼굴을 들어 아이를 봤더니 휴대폰을 보지 말고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단다. 사실 딸은 말이 좀 많다.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종달종달 지저귄다. 애교도 많고 스킨십도 많다. 이렇게 쓰고 보니 얼마나 예쁜 아이인지... 하지만 매일 그 아이와 함께 사는 내 반응은 대체적으로 옳지 않다. 호응을 많이 해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말이 길어져 시간제한을 둔다. 그 시간 외에는 친절하나 약간은 거리를 두는 편이다.
엄마 다녀올게~ 인사하며 매일 문을 나선다. 사실 직장에 갔다가 다시 올수 있는지는 다녀와봐야 아는 일이다. 아이와 나에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게 기본값이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행운 속에 살아간다는 감사함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형수들은 죽음이 예정된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고 처절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죽을 날을 모른다. 집행이 되는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는 것을 알고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죽을 날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도 어느날 갑자기 갈수 있는 일이다.
삶이 영원하기라도 한 듯 일상을 살아간다. 내일의 나는 당연하고 내년, 수년 후의 내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 내 소중한 가족이 내 곁에 있다는 자체로 행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고작 문제집 안하고 해야 할 공부나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운으로 주어진 감사해야 할 시간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소모한다. 8년전 암이라는 질병,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고 살아있는 행운을 가졌음에도 일상의 분주함이 시시각각 소중한 것들을 가렸다.
엄마는 매니저도 감독관도 아니다. 심지어 엄마는 아이의 그 어떤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에 봤던 어느 책에서 사람은 20대의 시선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했다. 내 20년 전의 시선으로 아이의 10년 후를 내다볼 수 있을까? 30년을 건너뛰어 미래를 내다볼 능력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관리 잘해주고 정보력 좋은 엄마가 아니다. 상처 입고 무너져 들어오는 날 안겨 쉴 수 있는 엄마의 품이 필요하다. 기운 차리고 또 한 번 긍정적 마음으로 밖을 향할 수 있는 마음만이 우리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