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테 안경을 쓴 가가멜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9화

by rainon 김승진

대머리 뚱보 뱀 놈이 마시던 테이블 자리를 치우려는데 이지의 전화기가 또다시 요란스럽게 진동해댔다. 안 받으면 그냥 말 것이지... 왜 자꾸?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이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뭐야? 니가 왜 아빠 전화를! ...... 뭐??? 뭐라고??? ... 거기 어디야???”


한산병원 응급실을 향해 은옥은 거칠게 핸들을 꺾으며 액셀을 힘껏 밟았다. “언니! 운전 천천히 해! 나 괜찮아. 급할 거 없어. 어차피 우리가 좀 빨리 간다고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못된 년! 싸가지 하고는! 야! 나한테는 작은 아버지야!! 언제까지 그렇게 투명인간 취급할 거니? 그래도 니 아빠잖아! 아빠!!!”


응급실 입구로 은옥과 이지가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본 태연이 침대 옆 의자에서 일어섰다. 셔츠에 흙과 피가 잔뜩 묻은 태연을 잠깐 바라보다 눈길을 거둔 이지는 침대에 누워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는 피투성이 안명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옛 연인이 외면하는 태연을 반긴 것은 은옥이었다. “태연아! 정말 오랜만이다. 운전하다 몇 번 지나가는 너 보기는 했는데... 이게 참... 얼마만이야... 그래도... 참 천만다행이다. 너 아녔으면... 작은 아버지 어쩔 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내일까지 정밀검사를 해봐야겠어요.” 응급실 당직의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관들이 태연과 이지 앞으로 끼어들었다.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목격자와 보호자 분, 우선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머뭇거리는 이지의 등을 은옥이 떠밀었다. “작은 아버지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어서 다녀와.”


순찰차 뒷좌석. 가만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지의 옆모습.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창백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지의 눈물을 보고서 태연은 침묵을 이어갔다. 두어 달 전, 공무원 공채 필기시험장에서 감독관과 응시생으로 6년 만에 만난 옛 연인. 이제 3일 후부터는 함께 의회에서 일하게 될 옛 연인. 그 두 가지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힘내라는 위로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하는 상황에 태연은 더 착잡해졌다.


“안명훈 씨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셨다구요?” “네. 처음엔 안명훈 씨라는 걸 몰랐지만... 남자 셋이 폐건물 쪽으로 데려가는 것부터 봤습니다.” “근데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 “그냥...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안명훈 씨가 안이지 씨 아버지라는 건 예전부터 알았었구요.” “그래도 피해자한테는 불행 중 다행이었네요. 유태연 씨가 바로 구급차를 불렀으니 망정이지... 거긴 워낙 외진 곳이라 하마터면... 금품을 노린 강도는 아닌 것 같고... 계획적인 원한 범죄 같은데... 안이지 씨. 요 근래 아버지한테서 뭐 들은 얘기는 없었나요?” “......” “안이지 씨? 충격이 큰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협조를...”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몇 년 됐어요. 들은 얘기 전혀 없어요.”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흠... 두 분은 가셔도 좋구요. 다시 저희가 연락을 드릴 테니까... 음... 몇 번 더 오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전화 꼭 받아 주셔야 합니다.”


경찰서 건물 1층 밖 벤치. 털썩 앉아 있는 이지에게 태연이 자판기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여름 끝자락을 뒤덮은 밤공기가 둘 사이의 침묵을 슬며시 채우고 있었다. “고마워...” 서늘한 밤공기를 깨뜨리며 이지가 작게 말했다. 곁에 선 채로 대답할 말을 찾는 태연을 이지가 올려다보았다. “괜히... 고생했네. 우리 아빠 때문에... 이제 집에 가.” “병원까지만 데려다줄게.” 태연은 전화기를 꺼내 콜택시를 불렀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집에 돌아온 태연은 피 묻은 옷들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몸을 씻었다. 극도로 긴장했던 몸뚱이는 파김치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맡 핸드폰으로 손을 가져가다 태연은 그때서야 아까 폭행범들의 목소리를 녹음해 둔 사실이 생각났다. 그놈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탓에 녹음 상태는 좋지 못했지만 볼륨을 최대로 높이자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이 벌레 같은 새끼야!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한테는 새꺄! 공기도 사치다!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는 숨 쉴 자격 없어!”


다시 듣고 보니, 강도가 아닌 원한에 의한 보복 사건임이 분명했다. 이지에게 당장 보내줘야겠어. 황급히 메신저 창을 열던 태연은 헤어진 후 바뀐 그녀의 새 전화번호를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휴... 툭! 베개 옆에 핸드폰을 던지고 태연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응급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이지의 눈꺼풀을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웅성웅성 분주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도 그녀의 고막을 깨웠다. 침대 끝에 엎드려 있던 이지는 눈을 뜨자마자 아빠의 상태를 살폈다. 방울방울 내리는 링거 수액을 혈관으로 마시면서 안명훈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올까 고민하다 그냥 응급실 앞 화장실에서 세수만 하기로 마음먹고 일어서는 이지를 향해 사촌언니 은옥과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어났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어떡해... 내가 점심때까지 있을 테니까, 집에 가서 좀 씻고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고 와... 아. 그리고 이 분. 어디 기자라고... 요 앞에서 만났어. 너랑 좀 얘기를 하고 싶다는데...”


스머프...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왔던 그 까만 옷 입은 못된 악당 이름이 뭐였더라... 음... 맞다! 가가멜! 근데 만화에서 가가멜은 안경을 안 썼던 것 같은데...


뿔테 안경을 쓴 가가멜이 이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입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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