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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13. 2024

아스피린

[손바닥 소설]

달큼한 비린내가 잠을 깨운 것이다.


베갯잇을 적시고 있는 건 코피.

그게 코피라는 걸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려야 했다.


수십 번일까, 수백 번일까. 무수하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잠결에 생각하며 무시했다. 머리맡에 둔 소주병이 넘어져 남은 내용물이 베개에 스며든 것인 줄로 알았다.


코피에서는 알싸한 알코올 향이 났다. 그래서 베개와 머리카락을 적시는 그것이 핏빛인 줄도 몰랐다. 투명한 소주인 줄로만 알았다. 새벽이었으니까, 방에 불은 꺼져있었으니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알코올에 녹신하게 적셔진 몸뚱이는 침대 바닥에 붙어버렸다. 계속 흐르는 코피는 멎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몸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아니다. ‘거부’라는 적극적인 반동이 아니다. 그냥 그저, 몸은 머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과 몸을 잇는 그 어떤 실 비슷한 것을, 알코올이 녹여버린 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 어느 때부터는 속도에 속도를 더했겠지. 실은, 끊어진 것이 아니다. 가늘고 또 가늘어지다가 녹아버린 것이다.


몸뚱이와의 연결이 녹아 끊겨 자유로워진 생각이,

몸을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연다.


 거기 그 자리. 늘 거기 그 자리에, 변함없이, 말없이, 서 있는 버드나무.

창문을 열면 보이는 버드나무.


나무는 그녀다. 그녀는 나무다. 나무가 그녀고, 그녀가 나무다.


버드나무다.


그녀를 구성하던 원자들은 땅 밑 어느 뿌리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가지가 되고, 잎이 되고, 일부는 꽃도 되고. 그러다 일부는 어느 날인가 봄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가 다시 빗물에 앉아서 뿌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맑은 날 밤, 나무 아래 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 버들가지를 지나, 버들잎을 스쳐 두 눈으로 쏟아지는 별빛에서는 그녀 냄새가 났다.


하얗게 가루로 부서진 그녀는, 버드나무가 되었다.


과다출혈이라고,

딱딱한 의사의 목소리는 읊조렸었다. 반만 맞는 말이다.


출혈이 과다했던 건, 응급실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과다했던 때문이니까.


눈 덮인 산. 어느 바위 능선에서, 그녀의 찢긴 살갗 안쪽 근육은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홀로 눈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간 그녀의 눈망울처럼 피는 맑고도 묽었다. 멈추지를 않았다. 굳어지지도 않았다. 멈춤 없이 느린 피의 흐름은 그녀의 시간을 서둘러 재촉했다.


창문을 열고 창틀에 턱을 괴고서,

생각은 새벽 교교한 달빛에 젖은 버드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생각의 두 눈에는 눈물이, 생각의 입가에는 미소가 고인다.


알 수 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생각은 고개를 돌려 창문 옆 책상 위에 놓인 아스피린 약통으로 눈길을 떨군다. 그리고 약통 아래 반으로 접힌 채 가지런히 놓인 쪽지를, 다시 외워본다. 한 문장.


이 창문 밖으로 바로 보이는 저 버드나무 아래, 비가 내리는 날에 뿌려주세요.


이날을 기다렸는지도 몰라. 나도 모르게 말이지.


창문을 등지고 선 생각이 출혈하는 육신을 내려본다. 이제 때가 된 거야.


마음 가난한 속에서, 몸뚱이는 썩어가고 있었겠지. 알코올과 니코틴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피를 끈적하고 딱딱하게 굳혀가고 있었을 것이다. 멈출 수가 없었어.


맨 정신으로는 세상을 머리에 이고 숨 쉴 수가 없었다. 매일 밥 대신 소주 3병.


취하면 눈물은 미소가 된다.

눈물을 삼키고 미소를 머금기 위해 알코올로 몸을 적셔야만 했다.


그러면 비로소,

매일 밤,

버드나무 아래 팔베개하고 누워 하늘을 덮고서,

별빛으로 부서지며 쏟아지는 그녀 향기에 취할 수 있었다.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밖에는 숨 쉴 수가 없었다.


피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두려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의사 처방 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건 98정에 1만 원, 저용량 아스피린밖에 없었다.

피를 맑고 묽게 해야 한다.


매일 밤,

버드나무가 된 그녀가 펼치는 그늘을 깔고 누워있으려면,

달빛과 별빛이 뿌려주는 그녀의 향기를 마시려면,

피가 딱딱해지는 걸 늦춰야 한다.


알코올에 푹 잠긴 뇌는 거기까지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

결심한 듯, 혹은 체념한 듯,

생각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뚜벅뚜벅 걸어서 침대 위,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피로 물들어 가는 베개 위 머리통 안으로 들어간다.


버드나무껍질은 아스피린의 주성분.


수십 년 전 학교 화학 시간에 건너 들었던 토막 잡지식이 생각의 생각에 떠오른 마지막 글귀다.


피는 끈적해지지 않는다. 굳어지지 않는다. 딱딱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생각은 이내, 하염없이 흐르는 핏물에 천천히

녹아들어 간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기분이 좋다.


생각이 눈을 감으면서 몸뚱이는 소리 없이

웃는다.


...................................................


“나, 어젯밤에 몸이 이상했어.”


  “왜? 어디가?”


“갑자기 왼쪽 몸이 안 움직이는 거야. 내 맘대로 안 되는 거야. 편마비라고 하나? 아무튼 그런 상태로 한 시간 정도 되었나? 이대로 죽나? 겁이 나더라고. 그러다가. 왼쪽 머리 안쪽 어딘가에서 불이 번쩍! 하는 느낌이 들더니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더라. 그러고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어.”


  “그거네. 미니 뇌졸중. 병원 가 봐. 당장.”


“병원? 병원에 가기는 싫은데.”


  “맞다. 나 어제, 무슨 신문 기사에서 봤어. 아스피린. 그거 용량 낮은 걸로 매일 먹으면 뇌졸중을 예방할 수 있다나. 피를 묽게 해서 혈전 생기는 걸 막아준대.”


“그래? 그럼 그걸 먹어볼까? 아스피린? 약국에서 그냥 살 수 있는 건가?”


  “아스피린은 진통제니까, 처방전 없이 살 수 있겠지?...... 아냐, 안돼! 그래도 우선 병원에 가봐. 그게 먼저야!”


“병원은 싫다니까.”


  “어? 버스 온다. 얼른 타자. 근데 점심 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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