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詩에 붙여
문득문득 기억 속 서랍장에서 다시 꺼내는 이야기들이 있다. 텍스트를 소장하고 있지 않기에, 검색으로도 원문을 다시 찾을 수가 없기에, 다만 기억 속 잔상으로만 남아 있는 단편들. 그중 어느 작가의 목격담 하나는 가끔 저 홀로 서랍을 열고 나와서는, 되새기는 마음을 시리면서 따뜻하게 한다.
“추운 겨울, 어느 국밥집, 앞을 못 보는 아버지와 어린 딸, 초라한 두 걸인 손님이 전혀 반갑지 않아 쫓아내려는 주인,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적이는 소녀, 구겨진 지폐와 동전 몇 푼, ‘아저씨! 여기 돈 있어요. 국밥 두 개만 주세요. 얼른 먹고 갈게요.’, 후추와 소금을 넣는 척하며 눈먼 아빠의 그릇에 자기 국밥 속 고기를 옮겨 담는 딸...”
어쩌면 황지우 시인도 저 풍경을 마주치지 않았을까. 그래서 詩 ‘거룩한 식사’를 썼을지도 모를 일. 쫓겨날까 봐 주인에게 서둘러 돈부터 보여준 소녀는 앞 못 보는 아비에게 자기 고기를 덜어주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보는 이도 듣는 이도 눈물이 핑 도는데... 어린 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해맑게 웃었다고 한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라는 시인의 토로(吐露)는 소녀의 그 미소가 자아낸 것이 아니었을지...
그래서... “빈 자루는 스스로 서 있지 못한다.”는 말에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곡식 대신에 돈 대신에 그 자루에 들어 있을 무언가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곡식이나 돈으로도 바꾸지 못할 따스한 어떤 것일 수 있을 테니까....... 그 따스한 것의 이름을 떠올리며...... 손을 멈춘 채......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끝내... 가슴 시리게 따뜻한 그 무엇을 한 줄로 그려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집을 나서 전철역을 향한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이마가 보이지 않는 빌딩들 숲을 벗어나 발길 다다른 익숙한 시장통. 골목 안쪽 단골 소머리국밥집 아크릴 간판의 깨진 틈으로는 파리한 형광등이 오늘도 졸린 듯 깜빡이고 있었다. 국밥 하나, 소주 한 병. 오늘따라 더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뚝배기는 더 하얗게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 숟가락, 그리고 세상 모든 누추하고 거룩한 빈 자루들에게 마음속 건배를 속삭이며 한 잔을 털어 넣는다. 그리고...
소녀가 지었던 그 시리도록 따뜻한 미소가 빈 자루들을 가득 채우기를 소망하며, 읊는다.
거룩한 식사 – 황지우 詩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