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똑바로 못 받아? 귀머거리야? 점장 나오라 해!” 삿대질 즐기는 이 여자, 나랑 동갑 같은데. 명품을 전혀 모르는 소녀가 보기에도 온몸을 자기 앞수표로 휘감은 듯.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 죄송 연발하는 소녀의 시선은 5년째 신고 있는 시장표 운동화의 초라함을 비웃는 손님의 구두에. 예쁘다. 잠시 생각의 한눈을 파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지. 한두 번 겪는 수모가 아니니 그러려니. 점장에게 대판 깨지고 난 후, 퇴근길. 레스토랑 옆 옆 건물 1층 백화점 명품관 쇼윈도를 애써 외면하고 버스. 종점 정류장 앞은 분식집. 코를 괴롭히는 떡볶이 향과 튀김 기름 냄새. 어지럽다. 하지만 안 된다. 내일 아빠 고등어 구워 줘야 해. 외면당한 고픈 배는 또 삐친다. 미안해. 내게 너무 미안해.
보일러를 틀어두라 신신당부했지만, 기름 값 아까운 아빠는 장마에 젖은 채로 퀴퀴한 방구석에서 콜록콜록. 아침에 쪼개 먹고 남긴 라면 반 개, 수프 반 봉지. 소녀가 인정하는 최고의 속담은 ‘시장이 반찬’ 배가 또 삐치기 전에 어서 잠들어야 해...... 그런데,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헉! 누구세요!” “쉿! 해치려는 것 아냐.” “그래 훔쳐갈 것도 없다. 도둑님아.” “받아.” “이게 뭐죠? 성냥? 저 담배 안 피워요. 뭘 이렇게 많이도.” “성냥 아냐. 폭탄이야. 던지기만 하면 정확히 24시간 뒤에 알아서 터져. 딱 빌딩 하나씩 사라질 거야.” “네?” “억울하지 않아? 더럽지 않아? 네 가난이 네 죄인가? 낮에 그 부모 잘 만난 진상 여자애보다 네가 못할게 뭐지?” “......” “세상을 바꾸는 성냥이야. 이 더러운 세상 싹 다 씻어내자. 빌딩 네댓 개만 날려도 세상은 바뀔 거야. 요즘 인간들 겁 많거든.” “싫어요.” “왜?” “전 사람 죽이고 싶지는 않아요.” “걱정 마. 아무도 다치지 않아. 네가 성냥갑을 던지고 나면, 방송사로 추적 불가능한 예고 메일이 발송된다. 24시간이면 쥐새끼 한 마리까지 미리 탈출시킬 수 있어. 우리 목표는 철골 콘크리트만 부수자는 거야.” “... 우리?” “그래. 우리. 이 투명망토를 걸치고 나를 따라와.”
차에서 내린 곳은 도시 변두리 재개발 구역. 철거를 앞둔 15층 빈 건물 입구. 남자는 소녀에게 성냥갑을 건넨다. “가서 던지고 와. 나 외에는 아무도 널 볼 수 없어. 그리고 투명망토가 던지는 성냥갑도 함께 투명해진다. 절대 못 찾지.” 홀린 듯, 소녀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성냥갑을 던진다. 째깍째깍. 남자는 손목시계의 스톱워치를 켠다. “24시간이야. 뉴스를 보면 내 말이 거짓 아니란 걸 알게 될 거야.”
모든 것은 남자의 말대로 된다. 어느 더위 먹은 놈의 장난이겠거니, 읽히다 휴지통에 처박혔던 메일은 다음날 온 나라 모든 뉴스의 톱에 오른다. 음식 쟁반을 들고 오가는 레스토랑 홀의 모두가 다 그 얘기들뿐. 소녀는 어지럽다.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아침에 삼킨 라면 반 개를 다 게워낸다. 어지러움이 가시고 난 자리의 후련함은 이내 짜릿한 쾌감으로. 토사물을 닦아낸 입가에는 슬프고 잔인한 미소가 스친다. 소녀는 남자와 ‘우리’가 되기로 한다.
툭! 성냥갑을 던진 손바닥을 소녀가 들여다본다. 소녀의 마음이 거기 들어있다. 아무것도 없다. 그래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다치지 않아. 성냥 폭탄은 딱 빌딩 외벽 안으로만 터진다. 건물 벽을 에워싸게 될 군인도 경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이 지긋지긋 더러운 늪 같은 자본주의의 도미노 하나가 사라지는 것뿐.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는 설명하기 힘든 쾌감의 늪에 빠져 해방감에 젖는다. 바로 그때, 방송사와 신문사로 예고 메일이 날아든다. 지금부터는 던지는 자도, 막으려는 자도 실전이다.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이 도시를 지켜본다. 목표물에는 개미새끼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24시간. 헬기들이 요란스레 하늘을 헤집고 다니는 도시. 빌딩이 머지않게 바라다 보이는 산 중턱 공원 벤치. 소녀와 남자가 캔 맥주를 마신다. 긴 침묵을 깨고 남자가 속삭인다. 5, 4, 3, 2, 1, 0. 제로. 제로. 제로. 파괴가 이리도 찬란한 것이던가. 실전 1호 목표물이 안으로 터지는 순간. 피어오르는 불꽃. 튀어 오르는 자본주의의 조각들. 그 위 먼지구름 사이 무지개인가 오로라인가 빛의 향연. 소녀는 눈물을 흘린다. 이런 아름다움. 본 적이 없어. 나 멈출 수가 없겠어. 저 무지개인가 오로라인가 또 보고 싶어.
아수라장.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패닉의 늪에 풍덩. 얼굴도 이름도 없는 수배전단에 적힌 소녀의 몸값은 빌딩 하나가 날아갈 때마다 ‘0’이 하나씩 늘어가고. 차가운 테러리스트.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 투명망토 소녀가 투명한 성냥갑을 던지고 나면 남자는 어둠 속에서 킥킥킥, 메일을 던진다. 1, 2, 3, 4, 5... 5, 4, 3, 2, 1... 빌딩이 하나씩 오로라가 될 때마다 소녀와 남자는 카운트다운을 속삭이며 맥주 캔을 비운다. 아수라장. 희생자 ‘0’인, 이 만화 같은 테러는 남자의 뜻대로 착착 전개되고.
기자들은 똑똑해. 자본주의와 부에 대한 증오 테러라는 분석 기사가 쏟아지고, 빌딩 10개 가진 인간들은, 여기서 손절하자. 그중 1개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앞 다퉈 나선다. 좌파 정당들은, 때는 이때다. 경제 구조를 뜯어고치자는 개헌을 주장하고. 그런데 보수의 반격. 날아가는 빌딩과 함께 졸지에 일자리를 날리게 된 청소 아줌마, 경비 아저씨들의 절규가 인터넷을 도배하기 시작. 소녀의 눈이 흔들린다. 이건 생각 못했어. 이건 아닌데... 남자가 말한다. 새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는 교통사고도 있는 법이야. 큰 가치를 위한 작은 희생이야. 짧고 굵게 끝내려면 멈춰서는 안 돼. 계속... 소녀는 성냥갑을 던지고, 남자는? 메일을 이번에는 안 던진다. 결국 피를 보아야겠어.
구름이 달을 삼킨 밤. 소녀는 공원에 앉아 오로라를 기다리며 캔 맥주를 마신다. 오늘따라 맥주가 비리다. 반쯤 마시고 난 맥주를 허공에 뿌리고는 남자에게, “오늘은 오로라 안 볼래. 먼저 갈게. 그런데... 오늘은 왜 헬기가 하늘에 없지?” “메일 안 보냈어. 이번엔.” “뭐? 미쳤어? 이건 아니야! 나, 나 이제 그만할래. 너 왜 날 끌어들인 거야? 성냥갑은 네가 던져도 되잖아!” “투명망토가 내겐 너무 작아. 알겠어. 넌 이제 빠져.” “다시는 나타나지 마! 이 개자식아!” 돌아온 집에... 아빠가 없다! 피를 토하며 살려달라는 아빠를 이웃집 아줌마가 구급차에 태웠단다. 병원이 어디죠? 네?
소녀는 달린다. 시간이 없어! 제발! 제발! 온몸이 땀에 젖은 소녀가 병원이 입주한 빌딩 앞에 도착했을 때, 남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10, 9, 8, 7... 빌딩 1층 화장실, 성냥갑 앞에 소녀가 이르자, 4, 3, 2, 1...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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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on 중편소설
[브런치북] 성냥 던지는 소녀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