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 소총을 분해해서 기름때와 먼지를 제거하는 작업을 총기 ‘수입’이라고 부른다. 취침 시간에 허가를 받아 다른 활동(대부분 드라마 시청)을 하는 것을 ‘연등’이라고 한다. 원거리 야외에서 훈련이나 작업을 할 경우에 밖에서 먹을 음식이 실려 나가는 것은 식사 ‘추진’이라고 한다. ‘수입’, ‘연등’, ‘추진’... 통상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군대 용어들이다. 최대한 빨리 이 말들을 깨치는 것이 군 생활에 그나마 빨리 적응하는 길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군대만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통 사용하는 말의 뜻이 전혀 달라지는 지점은 법(法)의 영역에도 상당하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선의(善意)와 악의(惡意)가 아닐지.
선의[善意] 명사
(1) 남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거나 좋은 목적을 가진 착한 마음.
(2) [법률] 어떤 일에 대한 법률관계의 사정이나 사실을 알지 못함.
악의[惡意] 명사
(1) 남을 해치려 하거나 미워하는 악한 마음.
(3) [법률] 어떤 사정을 알고 있는 일.
(출처: 다음 국어사전)
법대 1학년생이 처음 법서(法書)를 대할 때에 당혹스러운 순간들 중 하나가 바로 여기일 것. 일반적으로 ‘착하다’, ‘나쁘다’로 이해되는 ‘선의’와 ‘악의’는 법전에서는 전혀 다른 뜻이 돼버린다. ‘모르다’와 ‘알다’. 법의 영역에서는‘모르면 착한 것’, ‘알면 나쁜 것’이라는 별 희한한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머릿속 상태(모르거나 알거나)와 마음속 심보(착하거나 못됐거나)가 이렇게 묘하게 연결되는 상황은 상당히 독특하다.
제8조(영업의 허락)
①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허락을 얻은 특정한 영업에 관하여는 성년자와 동일한 행위능력이 있다.
② 법정대리인은 전항의 허락을 취소 또는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의 제삼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미성년자(만 19세 미만의 사람)는 스스로 혼자의 결정으로는 그 어떠한 거래행위도 할 수 없는 것이 민법이 정한 대원칙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를 배려한 여러 예외조항을 민법은 아울러 마련하고 있다. (본 매거진의 이전 글 참고) 법정대리인(부모)이 준 용돈으로 과자나 학용품을 구입하는 행위, 절대로 손해 볼 일 없는 거래행위(누군가 거저 주는 재산을 받기만 하는 경우)는 미성년자 단독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성년자가 부모의 허락을 받아서 어떠한 영업행위를 한다면, 쉽게 말해 자신의 이름으로 뭔가 사업을 시작한다면 그 사업에 관해서만큼은 스스로 모든 거래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민법 제8조 제1항은 선언하고 있다. 이 조항은미성년자인 사장님의 자유로운 거래행위를 허락하는 것이다. 일단 포괄적으로 '사업'의 허락을 부모로부터 받은 이상, 그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전개될 수많은 개별적 거래행위는 굳이 다시 일일이 부모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게끔 해주자는 법기술의 배려다.
물론 이 경우에도, 법정대리인(부모)은 미성년자의 영업 허락을 사후에 취소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할 수도 있다.(민법 제8조 제2항) 하지만, 이미 미성년자 사장님과 거래관계를 형성한 상대방 측은 그 사실을 미처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 아무 문제없이 미성년자가 운영하는 분식점에 고추장과 밀가루를 납품하던 도매상으로서는 그날 밤 벌어진 미성년자 사장과 그 부모 사이의 대판 싸움이나 “너 이제 장사 그만해!”라는 화난 사장 아버지의 호통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법에서는, 몰랐다면 용서가 된다. (물론 몰랐다는 사실을 재판에서 증명하는 문제가 남지만) 어쨌거나, 이러저러한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은 법이 기본적으로 보호한다.고추장 납품계약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며, 도매상은 어린 사장님에게 고추장 값을 달라고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이래서 법에서는 ‘모르면(선의이면) 착한(선의인) 놈’이라는 좀 신기한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인 셈이다. 퍽 재밌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법전에 최초로 등장하는 ‘모르면 무죄(?) 무식은 죄가 아니다(?)’ 조항(선의자 보호 규정)인 제8조 제2항을 시작으로, 민법에는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는 조문이 새털처럼 많다. 수험적으로는 이 선의의 제3자 보호 조항(여기에 무과실까지 요구하는 경우를 더해서)을 사실상 전부 외워야 하는 난제를 남기기도 한다.
사실 민법은 무작정 ‘몰랐던 사정을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선의자 보호 규정의 상당수는 이에 더해 ‘몰랐음에 잘못이 없음(무과실)’까지를 추가로 요구한다. ‘뭔가를 미처 알지 못하였고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경우’에만 어떤 책임이나 불이익에서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민법의 선의 제3자 보호규정의 의미는 좀 더 뚜렷해진다. ‘죄 없이 몰랐던 게 죄는 아니니까’
(글머리에서 언급했던) 머릿속 상태(모르거나 알거나)와 마음속 심보(착하거나 못됐거나)의 묘한 연결, 다시 말해 ‘모르고 알고’의 문제가 ‘착하고 나쁘고’의 판단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 법제에서는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바로 그것이다. ‘위기에 처한 타인을 보고도(그 상황을 알고서도) 돕지 않는다면 처벌한다.’는 것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다. 직업상 응급 구조의 의무가 당연히 전제된 경찰관, 소방관, 의사 등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법에서는 처벌하지 않는 것이 일단 원칙이다. 하지만, 일부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도입한 나라에서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법적으로 강제된다. 일단 알았다면 착한 일을 반드시 하라, 일단 악의였다면 선의를 반드시 베풀라는 것이다. (이를 채택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저 홀로 안온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던지는 질문. 모르면 착하고, 알면 악한 것인가? 현실에서는 그런 경우가 아주 아주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흔히들 ‘바보’라고 무시당하는 순박한 이들, 그들은 뭘 모르기 때문에서라도 남을 해치지 못한다. 몰라서 착한 것이다. 반면, 제법 영리한 놈들, 알만큼 아는 놈들 중에 악당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에 많이들 고개를 끄덕일 것.
<작가의 변명 두 토막>
1) 감히 주제넘게 법(法)을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법에 관한 전문 자격도 없이 얄팍한 지식만으로 글을 풀어나가는 것에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괜히 시작했구나 싶은 막막함을 실토합니다. 어디까지나 가볍게 읽히기를 바라는 ‘심심풀이 땅콩 같은 글’ 일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아마추어 작가가 게재하는 이 매거진의 글들은 특정한 사건의 해결을 도울 수 없음을 분명히 전제해 둡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적 문제는 변호사 등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 글은 다만, 법을 소재로 한 깃털처럼 가볍고 싱거운 수필일 뿐입니다.
2) 법(法)은 복잡합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한 줄로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예외와 변칙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특히 예외 되는 부분)을 전부 하나하나 부연하다 보면, 이 매거진은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학문적인 교과서의 흉내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쓸 능력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읽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굳이 논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정확한 법적 용어 대신 일상적인 통상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