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어?”
자기감정을 표현하기를 가장 어려워하는 K가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부산에 살 때가 가장 좋았다고.
그게 벌써 꼭 이십 년이 되었다.
신년 인사이동에서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었다.
전세를 끼고 샀던 G시의 아파트를 수리하고 이사를 한지 두 달 쯤 됐을 무렵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 방과 후 교사 일을 시작한 지 2개월 차였다.
어떡하나? 주말 부부가 돼야 하는 건가? 같이 내려가야 하나, 를 고민 하던 것도 잠시
사춘기에 접어든 중 2 큰아이를 보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민감한 시기의 사내아이에게 남자 어른이 반드시 있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발령이 나고 이틀 후부터 K는 부산으로 출근을 하기 위해 먼저 내려갔고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인지 집은 부동산에 내 놓자마자 바로 계약이 됐으며
그 다음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발령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나는 해운대에 있는 아파트 16층에서 까마득한 아파트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기는 절대 안 가고 혼자라도 남겠다며 완강하던 K2를 강아지를 입양하는 것으로 회유까지 했었다.
그 때는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는 그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라는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태어나서 수도권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 향수병이 걸린 나와는 달리
K는 날개를 단 것처럼 보였다.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늘 바빴는데, 그 것이 업무 때문이 아니라 직원들과의 화합의 장(?)을 자주 가지느라 그랬다.
직원들의 단골 가게였던 자갈치시장의 00상회에는 일주일에 여덟 번 간 적도 있었고
울산으로 경주로 가덕도로 거제로 거기에 제주도 한라산 등반까지 K의 시간은 그들과 함께 흘러갔다.
육 개월쯤 살았을 때에는 이미 웬만한 부산 사람보다 부산을 더 잘 알게 돼서
그 곳으로 출장을 오는 본사 직원들을 안내할 수준까지 되었다.
일 년 반 만에 아이 학교 배정문제 때문에 나와 아이들이 먼저 올라오고
K는 그 후로도 일 년 반을 더 있다가 다시 발령을 받아 집으로 왔다.
서울로 온 후에도 그 때 어울리던 멤버들과 가끔 회식도 하고 여행도 하는 것 같았다.
거의 이십 킬로그램 가까이 늘어난 체중이 K의 부산 생활의 진하게 누린 증거처럼 보였다.
덕분에(?) 당뇨 진단을 받기는 했지만 그 시절이 K에게는 화양연화였다고 말할 때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전근 이직 승진 퇴사 등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때마다 내게도 종종 들려주고는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런 얘기들이 뚝 끊긴 느낌이 들어 물었다.
“요즘은 부산 멤버들 안 만나나?”
“으응, 그거, 뭐 그렇게 됐어.”
더 얘기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 K의 표정이 낯설었다.
K로 말할 것 같으면, 스스로 판을 만들지는 않지만
만들어진 판에서는 최선을 다해 잘 적응하는 캐릭터다.
하여 나의 빈곤한 인적 네트워크에 비하면 그의 모임은 가끔 겹칠 때도 있고
좋은 계절에는 여행 계획과 식사 일정으로 그의 다이어리가 꽉 차고는 한다.
그런 모임 중에서도 부산 모임은 가장 끈끈하게 오래갈 거라 생각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중에 띄엄띄엄 들은 얘기를 종합해 유추해보자면 그들의 기대와 K의 표현에 서툰 성향이 서로 어긋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 시들해질 수도 있고 오해로 와해 될 수도 있지만
그게 그 모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내가 다 당혹스러운데 K는 오죽하겠나 싶어 마음이 짠했다.
일 년 중 며칠 안 되는 좋은 날씨가 이어지는 요즘
한참 뜸했던 방랑벽이 스멀스멀 올라와, 바다도 보고 싶고 캠핑도 가고 싶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 씻지도 말고 입은 옷 그대로 드라이브를 나가자고 K가 말했다.
예전 살던 곳에서는 대충 그런 기분이 들 때면
파주로, 강화로, 가끔 임진각에도 휭하니 다녀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바람 좀 쏘이고 오자며 나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우선은 집 근처를 빠져 나가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니 더 그렇다.
하여 마음먹은 김에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호수에 가기로 했다.
보통은 내가 먼저 말을 하고, 대답을 하기는 하려나 하고 있으면 K가 대답을 하는 순서인데
그 날은 어쩐 일인지 그가 먼저 입을 뗀다.
“그 때도 화양연화였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해서 고개를 외로 돌려 멀뚱히 K의 얼굴을 쳐다봤다.
“재작년에 말이야. 조리사 실습하러 다닐 때 이 길로 다녔잖아.”
“그런데 그게 왜?”
“걷고 싶으면 걸어서 갈 수도 있고 버스도 탈 수 있고 차로는 십 분 밖에 안 걸려.
얼마나 좋아. 맛있는 점심도 주고 공짜로 교육도 해주는데.“
“.......”
내 기억에는 그 당시 수업 마치고 집에 돌아온, 마치 영혼을 어디다 털리고 온 것처럼 퀭했던 그의 얼굴이 선명해서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부산시절을 그렇게 말할 때 그의 표정하고는 전혀 달라서 다행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부모 품을 떠났다고 해서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듯
K에게 그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없다고 해서 부산에서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 번 화양연화는 영원한 화양연화이고, 화양연화가 많으면 또 어떤가.
이제부터의 시간들을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K의 날들이 날마다 화양연화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