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어느 날 네 식구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어떻게 시작된 건지 모르지만 상 위에 놓인 반찬이름을 각자 별명으로 붙이기 시작했다.
오빠는 고사리가 맛있다고 해서 고사리, 동생은 감자를 좋아해서 감자로
그리고 남은 반찬은 우거지 뿐이었다.
하여 내 기호와는 상관없이 내 별명은 우거지가 되었다.
내 입맛은 잘 몰랐지만 동생의 취향은 기억이 난다.
동생은 국이며 볶음, 조림 등 감자로 만든 반찬을 좋아했고 특히 만두를 좋아했다.
그에 비해 나는 특별히 좋거나 싫어하는 음식은 없었지만 감자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시골에 다녀 올 때면 일산역에서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촌역에 내려 이대입구까지 걸어와 골목으로 들어가 대흥극장 건너편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집에 도착했다.
그 무렵 엄마는 시골에 가기만 하면 이집 저집에서 친척들이 주는 감자며 곡식, 푸성귀 들을 사양하지 않고 욕심껏 챙겼다.
그래봐야 일고여덟살 쯤이었을 내게 보자기에 싼 큼직한 감자더미를 머리에 이어 주었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감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머리를 내리 눌렀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해가 져 캄캄했다.
잠이 들었다 깨서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비몽사몽 내 몸도 가누기 힘든데 엄마는 다시 감자 보따리를 내 머리에 올려 놓았다.
감자가 아니라 자갈돌을 이고 걷는 느낌이었다.
보따리를 아무리 다시 고쳐봐도 감자는 점점 머리통을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목이 몸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 같고 어느 덧 눈물이 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문득 궁금하다.
그 날 엄마가 오빠에게는 뭘 들려 주었을까, 동생은? 엄마는?
동생은 몰라도 오빠에게는 최소한 배추 열 통 쯤이나 쌀 한 말이거나 혹은 무 열 개쯤은 짊어지어 줬겠지?
아니, 그랬어야 한다.
나는 감자가 지긋지긋했다.
감자를 채 썰어 양파와 기름에 볶아 놓은 반찬을 야무지게 잘 먹던 동생은 누님의 머리 윗면이 헬기장처럼 납작하고 목이 짧아진 이유를 알기나 할까 몰라.
‘그래, 너라도 잘 먹으니 됐다.’
여행작가와 함께하는 강원도 여행 중에 강릉 감자 옹심이라를 것을 처음 먹었다.
강릉이 고향인 작가가 추천한 식당이기는 했지만 감자요리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한 테이블마다 자그마한 옹기에 담아 주는 옹심이는 감자전분으로 만든 수제비라고 했는데 그 것은 이제까지의 감자에 대한 편견을 깼다.
아무렇게나 떼어 넣은 것 같은 반투명한 옹심이는 특별한 쫄깃함에 가느다란 공기방울이 터지는 것 같은 요상한 식감이 환상이었다.
생각해보니 감자를 직접요리한 것이 아니고 갈아서 전분형태로 만든 감자떡도 좋았고
감자전도 좋아하게 된 지도 좀 됐다.
나는 감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홋카이도 여행 중 먹었던 스프카레에는 해물을 비롯해서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넣은 메뉴가 있었는데 나는 양고기를 선택했었다.
음식이 나왔을 때 양고기보다 채소를 먹느라 젓가락질이 더 바빴다.
단호박, 버섯, 브로콜리, 큼직하게 토막낸 당근 그리고 감자
세상에, 스프카레에 들어간 채소는 감자도 맛있었다.
이 정도면 비건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감자가 맛있어서 감자로 만든 음식은 뭐든 맛이 좋다고 했다.
심지어 감자스낵까지 유명하다고 했다.
내 머리에 얹힌 짐이 너무 무거워서 엄마의 머리에 얹힌 것을 보지 못했었다.
엄마의 머리통 모양은 작고 동그랗지만 그 머리위에 수도없는 짐을 이었을 것을 안다.
나는 목이 짧아졌지만 엄마는 키가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빠는 감자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왔으면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엄마는 말한다.
“푸성귀라도 누가 준다고만 하면 덥썩 받아왔지, 서울서 사먹으려면 그게 다 돈이잖아.”
나는 감자가 싫었던 게 아니라 춥고 시린 그 시간이 서러웠던 것 같다.
짐짐하고 푸석해서 싫었던 감자가 쫄깃하고 포슬한 느낌으로 좋아졌듯이
어둡고 축축했던 기억들도 화사하고 애틋한 추억이 되어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