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부뚜막 앞에 앉아서 손에는 이유식 병처럼 생긴 작은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가 그 것을 장에서 샀을리는 없고 아마도 아버지가 가져온 신문물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짙은 노랑처럼도 보이고 똥색처럼도 보이는 그 것의 이름은 카레라고 했다.
엄마는 그 것을 손에 들고 깨알같은 영어 글자를 들여다보며 한참을 진땀을 흘렸던 것 같다.
그 때 내 나이는 세 살 이후였고 아무리 많아봤자 여섯 살 이전이었다.
기억조작일 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 나이에 처음 카레맛을 알아버렸다.
문제는 그 때 이후 그 맛과 같은 카레를 다시 맛보지 못했다는 거다.
시간이 갈수록 조리하기 편리한 형태로 바뀌어 가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맛이 개발되기도 하지만 그 때의 순수하게 칼칼하고 특유의 진한 향이 나는 카레는 없었다.
그만큼 나의 첫 카레의 기억은 강렬했던 것 같다.
두 번째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좀 억울하고 서럽고 우울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하는 엄마대신 저녁식사는 내가 해야했는데 카레는 식구들 모두 좋아하면서 만들기도 어렵지 않아서 자주 오르는 메뉴였다.
그 날은 매 번 먹는 덮밥이 아닌 조금 색다른 걸 해보고 싶어서 봉투 뒷면에 있는 볶음밥레시피대로 해봤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생각을 처음부터 했어야 했는데 덮밥용으로 썬 채소를 이미 볶은 뒤였다는 거다.
결과물은 처참했다. 카레가루가 듬성듬성 묻은 깍뚝 썬 감자와 당근에 밥을 넣어 볶았지만 재료가 모두 겉돌아 덮밥도 볶음밥도 아닌 괴상한 모양이 되었다.
당황스럽기로는 나만할까, 가슴이 쿵닥거리고 얼굴도 화끈거리는데 드라마에서라면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 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엄마는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이걸 먹으라고 한 거냐? 너나 다 먹어라.”
라며 불같이 화를 냈었다.
“어떻게 한결같이 카레스프라고 하냐?”
라며 K가 껄껄 웃었다.
“내가 그랬어?”
“응, 한 번도 안 틀리고... 스프카레가 그렇게 어렵나?”
장장 일 년 전부터 계획했던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왔다.
설국이나 러브레터 배경지에 간다고 설레는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삿뽀로에는 맛있는 게 너무 많아서 어떻게 끼니는 쪼개나를 고민하면서 떠났다.
그 중 이미 홋카이도 여행 경험이 있는 Y는 스프카레는 꼭 먹어야 한다며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입맛을 다셨다.
스프카레? 카레국이라는 말인가? 카레맛 스프라는 말인가? 어떻게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 저녁으로 스프카레를 먹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스프카레식당이 있어서 예습을 하고 왔지만 그 것과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맛있다. 입에 착 붙었다. 순댓국이며 해장국 등 국밥 종류의 국물을 대부분 남기는 것에 비해 스프카레는 그릇바닥이 보이게 다 먹었다.
브로콜리도 스프카레에 들어있는 것은 맛있었고, 큼직하게 쑹덩 썰어넣은 당근이며 감자가 맛있기도 처음이다. 그러면서 국물도 맑고 칼칼하다.
여행하는 동안 매끼니 스프카레만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랬으면서 그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니.
아침에 교육원에 가면서 점심을 뭘로 먹을까 묻길레 스프카레 다시 한 번 먹어보자고 했더니
K가 껄껄 웃으며 카레스프 아니고 스프카레! 라고 정정해준다.
갑자기 나문희 아줌마의 호박 고구마 호박 고구마 호박 고구마!!!처럼
스프카레! 스프카레! 스프카레!! 라고 외치고 싶었다.
스프카레면 어떻고 카페스프면 또 어떤가.
이로써 내게는 카레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이 생겼다.
가족 여섯 명 완결체로 꿈같은 설국 여행중 먹은 스프카레는
아마도 떠올릴 때마다 저절로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