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오빠에게 옆구리를 한 대 얻어맞고 왜 때리냐고 따지면 엄마는 어린 것이 오빠에게 대든다고 나를 나무랬다. 동생에게 머리채를 잡혀서 내가 한 대 때렸을 때는 또, 다 큰 것이 이해심도 없이 동생을 때린다고 했다.
위로 오빠와 아래로 남동생이 있는 나를 사람들은 고명딸 혹은 양념딸이라고 불렀다.
둘 다 좋은 의미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째서 오빠는 이해심도 없이 동생을 그것도 여동생을 때렸어도 혼나지 않으며 누나에게 덤비는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을 나무라지 않는 건지 나는 늘 그게 억울했다.
그래서였을까? 살면서 억울한 상황은 종종 내게만 벌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일테면 친구와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갔을 때 어쩐지 강사가 나보다 친구에게 공을 더 많이 던져주는 기분이 들어 혼자 삐쳤다가 곧 강습을 그만 두었다.
결혼식 날짜가 하루 늦은 친구 커플과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는데 비용도 아낄겸 택시투어를 함께 하기로 했었다. 네 명이 타야하는 택시에 번번이 친구 커플이 뒷좌석에 나란히 앉고 나와 K는 앞 뒤로 떨어져 앉았던 것은 그냥 그렇다 치기로 했다.
그런데 운전을 하면서 가이드겸 포토그래퍼까지 자처하는 기사님이 우리보다 친구 커플 사진을 더 많이 찍어주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탓이었을까?
2일차였던가, 또 비슷한 기분이 들어 결국 내가 삐쳐서는 뾰루둥해서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은 아직도 그 날의 느낌이 생생하다. 그 곳이 광치기 해변이었다는 것은 최근 들어 K에게 듣고 알았다.
테니스 친구나 신혼여행 친구 모두 나보다 미모가 출중하다거나 성격이 더 상냥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저기요, 저한테도 공 좀 던져 주세요.’ 라든가
‘기사님, 여기서도 찍어주세요. 저기 배경 예쁘네요 저희도 찍어주세요.’라고 말을 하면 되지
하지만 막상 다시 그 상황이 된다면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무척 많은 인파가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저만치 사람들 사이로 두 사람이 이 쪽 방향을 향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얼핏 나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지만 신경쓰지 않고 내 갈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인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람들이 하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그 것도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어느 새 내 앞을 가로 막듯 선 그들이
“무슨 수심이 그렇게 많으세요.”
한다.
아차 싶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쁘고 늘씬하고 평범하거나 무표정한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아! 저 약속시간에 늦어서요.”
최소 열 걸음은 더 따라 오면서 잠깐 얘기만 좀 들어보라는 사람을 뿌리치고 걸으면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멍청해보였나? 제일 만만해보였을까?
어느 쪽도 기분이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아주 많으면 좋겠다던 모 연예인처럼 돈은 몰라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아는체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공감이 됐다.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전철역 주변을 지나치려면 티슈박스와 부직포 행주가 든 비닐백을 든 사람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홍보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어떤 이는 쉽게 포기하며 행인을 그냥 보내기도 하지만 더러는 무척 적극적으로 따라붙기도 하고
심지어 “아유, 정말 매정하시네. 얘기나 좀 들어봐요.” 라며 하소연을 하는 타입도 있었다.
하여 그 주변을 지나가야 할 때면 잔뜩 긴장을 하며 표정을 단호하게 하고는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몇 번이나 그 곳을 지나치도록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는 K와 걷기 운동 중이었다.
백화점 앞을 지나 큰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대여섯 사람이 각자 이사람 저사람에게 곽티슈와 부직포 행주가 든 비닐백을 들이밀며, 중도금대출 이자도 없고 전매도 가능하고... 등등 열띤 홍보를 하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내 앞사람에게 건네더니 나를 지나쳐 뒷 사람을 붙잡고 비닐백을 들이민다.
“아씨, 왜 나만 안 줘? 내가 무서워 보여서 그런가? 아님 돈이 없어 보이나?”
무릎나온 운동복바지에 목늘어난 티셔츠 차림을 훑어보며 투덜거리니 K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말 시켜도 뭐라카고 말 안시킨다고 또 뭐라칸다는 표정으로 보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봐도 웃겼다.
집에 아직 쓰지 않은 행주도 많고 포장도 뜯지 않은 곽티슈도 많으니 그게 탐났을리도 없다.
다음 날에는 공원길을 걸어 가는데 길가에 어제 그 건물 분양 홍보 가판대가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분양가가 대체 얼만데 저렇게 요란하게 홍보를 하나 싶어 안내지를 기웃거렸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바로 화색을 띠며 내게 다가온다.
‘앗! 이게 아닌데.’
하나도 안 궁금한 것처럼 냅다 꽁무니를 빼는데 이건 뛰지 않으면서 빠르게 걸으려니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됐다.
‘맞아, 난 역시 말 시키는 것보다 말 안 시키는게 더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