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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Jul 05. 2024

나 오늘 집 하나 살 뻔 했잖아



이 얘기를 또 하게 될 줄 몰랐다.

연애하던 시절에도 못 해봤던 것을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하고 있다.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비 오는 날에는 드라이브하다가 예쁜 카페에서 비 보면서 차 마시고.

안 하던 일도 자꾸 하면 지겨워지게 마련일텐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그 하루하루가 매번 새롭다.

K의 주머니 사정이 곤궁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부분만 빼면 그렇다.

점심 메뉴 선택지가 그리 넓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어제도 일본어 수업을 마치고 K와 시내에서 만나 점심에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교차로에서 각자의 방향 신호를 따라 건널목을 건넜다.

날이 무척 더워진데다 그 시각은 보통 한시 무렵이라 해가 정수리 한 가운데 위에 있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늘 방향으로 살살 걸어서 집으로 간다.

어제는 중간에 꺾지 않고 쭉 끝까지 가 공원에서 한 번만 꺾을 예정이었다.

삼십 년이 넘은 공원길은 제법 그늘이 드리워져 어느 시간에 가도 서늘해서 좋다.



공원까지는 횡단보도를 세 번 건너야 하는데 어제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건널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신호운이 꽤 좋은 날이라 생각하니 걸음도 가벼워졌다.

마지막 횡단보도 도착과 동시에 신호가 바뀌어 쾌재를 부르며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자동차 소음 사이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이 곳으로 이사 온지 사 년차에 길에서 뒷모습을 보고 나를 부를만한 사람이 있을리 없어 무심히 가던길을 갔다.

그런데 건널목을 거의 다 건너 왔을 무렵 신호는 깜박거리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걸음이 앞으로 걸어지지를 않는다.

동시에 건널목 앞에는 한동안 거리에서 자주 눈에 띄던 오피스텔 홍보용 비닐백을 든 여성분이 서 있었고 나를 보는 줄 알았던 그의 눈길은 내 어깨를 지나쳐 내 뒤를 못마땅한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니 초로의 여성이 내 백팩 끈을 붙잡고 있었다.

역시나 다른 손에는 티슈가 든 백을 세 개나 들고 있었는데 정작 나를 붙잡고 있으면서 내게 말하는 게 아니라 앞에 있는 동료에게 뭐라고 변명같은 말을 하는 것 같다.


“응 저쪽 건너에서 같이 온 거야. 이게 말야 구역이 있어서.”


뒤엣말은 나 들으라고 소리를 낮춰 한 말인것 같은데 난 이 상황이 혼란스러워서 뿌리치기는커녕 도무지 뭐라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얘기만 좀 들으면 돼.”

“내가 이거 두 개 다 줄게.”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 이렇게라도 도와주면 좋은 거지 뭐. 안 그래?”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그냥 앉아만 있다 가면 돼. 그래야 내가 수당을 받아.”

“아유, 이렇게 도와주니 얼마나 좋아. 고마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게 아니라 말 할 새가 없었던 거였다.

소나기처럼 숨도 안 쉬고 퍼붓는 자칭 ‘늙은 사람’ 말과 함께 나는 목덜미를 붙잡힌 강아지처럼 내가 가야할 방향도 잊은 채 그가 떠미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안내(?)한 모델하우스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척척 진행됐다.

입구 안내 데스크에 앉은 직원이 전화번호를 적으라고 했고 

한 남성은 그 옆에서 신발 주머니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실내화를 갈아신고 신발을 넣으라고 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은 실내가 시원해서 아무데나 앉아서 얘기나 듣다 가면 좋겠건만

그들은 나름의 절차를 생략할 수 없다는 비장함으로 잠시의 틈도 주지 않았다.

견본 주택을 돌아보고 그 안에 설치된 가전과 가구 옵션이 모두 무상제공이라고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겠냐고도 물었다.

됐다고 하면 빨리 끝날까 싶어 안 먹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유리로 벽을 친 부스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부동산에 관해서 뭐 말을 해주면 알겠나마는 전부터 궁금한게 하나는 있었다.

무려 G시에 그것도 새로 생길 전철역 코앞 위치에다 H사에서 시공하는 건물인데 게다가 자기들 말로 잔여물량이라 대폭적인 분양가 할인까지 한다고 한 지가 최소 두 달은 넘은 것 같은데 어째서 아직도 이렇게 요란하게 홍보를 하느냐는 점이다.

하지만 그걸 물어본다고 해서 혹은 답을 듣는다고 해서 해결이 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마음에 드는 답을 들으면 의심이 생길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을 들으면 불안해질 게 뻔하니 말이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거나 알아도 우리 상황과 맞지 않는 얘기들을 거의 한 시간동안 듣고 밖으로 나오니 그 새 기온이 더 오른 것처럼 날이 푹푹 찐다.

K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말하기도 전에 거실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놓인 비닐 봉투를 보고 실소를 한다.


“나 오늘 거의 집 하나 살 뻔했잖아.”

“으이구 으이구... ”


당분간은 공원길을 피해 다른 길로 다녀야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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