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CODA>를 보고
'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혼자 토요일까지 일을 하고 있나.. '
토요일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다.
어제 어느 환자와 약 복용 후 생긴 부작용, 그리고 진료비에 대해 다툼이 있었다.
그게 꽤나 스트레스였는지 나는 기진맥진 해졌다. 진을 다 빼게 한, 그토록 대단한 진료비의 숫자는 1500원이었다.
오늘도 진료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어느 환자가 불만을 토로했다. 예민해진 나는 그냥 허허 웃으며 넘어가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자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 에라이.. 의사짓 못해 먹겠네.. '
뜬금없지만 난 사우나를 아주 좋아한다.
남들의 아프다는 소리 들으며 먹고사는 나에게 소중한 침묵의 힐링타임이다. 그런데 최근 사우나 이용 가격이 2천 원이 올랐다. 김밥 한 줄 4천 원의 시대가 도래했고, 사우나의 물값마저 오르다니...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시대에서 가장 물가 상승이 적은 건, 동네병원인 나의 진료비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동네병원의 의사를 만나는 진료비는 올해 240원이 인상되었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진료비는 국가에서 정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은 이미 적자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아~주 만약에!) 의사들에게 진료비를 올려주고 싶더라도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사는 저성장 시대에 마지막 남은, 돈 잘 버는 면허증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그 돈을 위해 얼마나 의사가 스스로 자기 착취를 하고 있는지는 남들은 모르겠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자기 착취를 하는 자신마저, 고민하지 않고 그저 관성에 젖어 그 착취를 하고 있을 테니.
그깟 직업이 뭐가 그리 좋다고 아이들에게 의대반이란 추악한 테두리를 만드는지. 다른 이름의 아동 학대를 하는 기괴한 사회와 어른들도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내 직업이 사양 산업이 되어간다는 직감을 느끼며... 평화로워야 마땅한 토요일 오후, 불만에 싸여 있었다.
기분이나 환기해 보자고 영화를 틀었다.
제목은 CODA (children of deaf adults)였다.
청각장애 부모에게서 태어난 정상인 딸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엄마, 아빠, 오빠는 모두 청각장애인이고, 주인공 딸만 정상인 가족이었다.
어부인 아빠와 오빠가 배에서 일할 때, 딸은 그들의 귀가 되어주기 위해 꼭 같이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노래가 하고 싶은 딸이 음대에 가려는 꿈과 가족을 떠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청각장애인 아빠는 딸의 합창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의 시선으로 딸의 노래를 보던 중, 영화는 서서히 음소거가 된다. 그렇게 영화는 몇 분 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빠의 장애를 경험하게 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그 시간 동안, 노래를 듣는 타인의 행복한 표정을 통해서만 가사의 내용을 유추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의 반응을 통해서 나의 행복을 찾고 있는 나와 겹쳐 보였다.
짧지만 큰 인상을 준 장면이었다. 잠깐 청각장애인의 시선이 되어본 그 시간 동안 나의 불만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 가득 찼던 불만이 묘하게 희미해졌다. 어찌 보면 비교에 의한 냉정한 위안이었다.
자신의 꿈과 가족의 부양 사이에서 갈등하던 딸은, 음악을 관두고 가족을 돕는 일을 택하려 한다.
그러자 장애인인 오빠는 오히려 여동생에게 화를 낸다. 그럴수록 우리는 너에게 더 의지하게 될 거라고.
그는 그렇게 장애 없는 동생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며 울분에 찬 수어를 온몸으로 뿜어낸다.
영화 속 인물도 그리고 나도, 남과의 비교에서 위안을 얻기도, 불행해지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 비교의 대상이 듣지 못하는 사람일만큼 치졸한 비교일지라도,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 위안은 동정이란 이타심으로 포장이 되겠지만..
가족은 결국 딸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놔주기로 한다. 딸은 음대에 합격해서 마을을 떠나며,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됐다.
나는 내심 딸이 음대에 합격하지 않는 엔딩을 바랬다. 그리고 상투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길 바랬다.
그것은 진짜 삶의 불행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실을 그대로 모사한 남의 불행이 나를 계속 위안해 주길 바라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주말의 영화 한 편은 나에게 평정심을 되찾게 해 줬다. 예술의 시작이 왜 비극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영화를 다 보고 가족과 저녁 외식을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갔다. 내 차 옆에 흔히 보기 힘든 형광색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었다. 내 차는 그저 고철 덩어리 같아 보였다. 괜히 문콕을 뒤집어쓸까 봐 문틈을 조금만 열고 혼자 낑낑대며 차에 올랐다.
'왜 내 옆에 대고 지랄이야..'
혼잣말을 궁시렁대며 시동을 걸었다.
집에 돌아와 영화 한 편을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