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할아버지 환자가 처음 진료를 보러 왔다.
인상 좋게 들어오는 그분은 아픈 사람 같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희 병원은 처음 오셨죠? 어떤 일로 오셨어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특별한 병이 있는 건 아닌데, 혈압은 괜찮은지, 당뇨가 생기진 않았는지, 간은 건강한지 피검사 한번 해보러 왔습니다~"
음.. 검사를 하러 오셨다.. 신환을 단골로 만들기 위한 나의 친절은 자동으로 배가 되었다.
"어휴. 피검사 좋죠~ 한 번만 따끔하시면 당뇨 있나, 간은 건강하신가, 혈관은 깨끗한가, 염증은 없나 다 알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건강하신가 다 알 수 있게 해 드릴게요~ 내일 오시면 자세히 결과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날 환자가 방문했고,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다.
슬프게도 노화란 모든 병의 위험인자라, 70대 노인의 결과지가 모두 깨끗한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 환자의 결과지는 빨간 화살표 하나 없이 깨끗했다.
"와. 어르신은 나이 가리고 검사 결과만 보면 30대인 줄 알겠어요. 혈당, 콜레스테롤, 간, 신장, 췌장수치 다 정상으로 건강하시네요~'
결과도 좋은데 기분도 좋으시라고, 건강 나이도 한참 낮춰서 설명을 해드렸다. 그리고 평범한 결과지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검진 책자도 그에게 건넸다. 책자를 받는 그의 손에 새끼손가락 한마디가 없는 게 보였다.
"아유.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 들려주시니 기분이 좋습니다. "
그가 대답했다.
간혹 이렇게 건강한 노인들을 보면 개인적인 호기심이 든다. 비결이 뭔지.. 반 백발을 향해가는 나의 당연한 호기심이었다. 그래서 여쭤봤다.
" 근데 어르신은 어떻게 이렇게 건강 관리를 잘하셨어요~?"
그가 말했다.
" 부모가 좋은 몸을 물려주셔서 그렇지요~"
그의 대답은 나의 예상을 빗나가 있었다.
80을 향해 가는 할아버지의 부모라..
나의 아버지뻘 되는 그에게, 또 한 세대를 역행해서 그의 부모를 상정하기란 나에게 좀 어색했다.
그는 부모를 보낸 지도 한참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흔적은 그의 삶에 희미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건강 비결을 부모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를 보니, 부모란 존재는 인생 황혼에도 잊혀지진 않는 것이었다.
부모는 인생의 시작을 상기시키기 때문일까.
세상에 던져지듯 태어나서 계속 존재의 이유를 물어야 하는 게 사람이기에,
부모를 찾는 건 마치 종교를 만들고 영원히 모를 창조주를 찾는 것과 같은 필연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족들이 같이 진료를 보러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아들은 아버지의 목소리 마저 닮아있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예민하고 까칠한 어머니의 불안은 고스란히 딸에게 전이되어 있기도 하다. 부모는 그렇게 한 사람에게 유전자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인생을 그 유전자가 아주 크게 결정한다면, 그것은 운명과 같은 단어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인생은 운명의 틀 안에 꽤나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건, 정해진 그 틀이 어떤 건지 난 알 수가 없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가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어찌해 볼 수 있는 건, 단지 하루의 삶일지 모른다. 그렇게 살아 나가는 인생에서 그 합이 모여 건강한 삶을 누릴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약한 유전자의 발현으로 갑작스러운 병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의 받아들임에는 필히 운명이란 인식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어르신 환자가 말한 부모의 물려줌이란, 그 운명을 가리킴이 아니었을까.
" 선생님~ 그럼 1년 후에 다시 검사하게 또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환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을 나갔다.
그 미소는 내가 건강하다는 자만심이나 희열은 아니었다. 점잖은 그 표정 속에 느껴지는 건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온 후에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덤덤함이었다.
그는 새끼손가락을 짧게 만들었을 고난에 대해 한 치 앞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며 70년 세월을 겹겹이 쌓았을 것이다. 그 속에서 점점 자신의 인생 여정을 알게 됐을 것이다.
그 여정엔 그저 운동, 식이조절, 긍정적인 마음 따위의 상투적인 노력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고통이 필연인 인간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그의 까만 검사 결과지 안에 녹아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