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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May 17. 2022

한나 아렌트 #7 -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필사


- (필사)

※ 만화책 내용을 필사한 것이라 조금 보기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



한나 아렌트의 엄마 : "유대인이라고 공격받으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단다."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19p)


한나 아렌트 : "아빠 서재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책들을 좀 꺼내줄 수 있어? 그 책을 전부 읽으면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아빠가 왜 죽어야 했고 한스는 왜 소리를 지르는지. 칸트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니까. 아, 그리고 엄마. 물어볼 게 하나 있어. 섹스가 뭐야?"

14살이 될 무렵, 나는 칸트의 저서를 전부 섭렵했다. 하지만 답을 모르는 일들은 여전히 있었다. 그래서 칸트가 읽은 책들까지 모조리 읽어보기로 했다. (같은 책, 24-25p)


사람들은 나에 대해 도무지 이해를 못 한다. 그들은 내가 어딘가 덜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세상에서 우리 엄마 한 사람만 빼고). 사실 나는 정말로 바보가 맞다. 그리고 이건 아마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노력을 기울여야 똑똑해질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5분 만에 '이해'하는 것도 나한테는 5시간이 걸린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내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이유는 알고 싶어서다. 이해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전혀. 그냥 내가 똑똑해보이니까 시기할 뿐이다. (같은 책, 28p)


엄마가 재혼하면서 새아빠와 자매들이 생겼고, 이전보다 세상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17살 무렵, 나는 이제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더 배울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책, 29p)


한나 아렌트 : "전 두려워요."

마르틴 하이데거 : "뭐가 두렵지? 너의 재능? 너의 천재성? 너도 나만큼이나 잘 알잖아. 진실을 추구하려면 그걸 붙잡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해. 그건 철학자이자 인간으로서 우리의 의무야." (같은 책, 41p)


로마니셰스의 단골들은 툭하면 야단법석을 떨었다.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바로 나다. 모두가 공정한 판결을 기뻐하며 지갑과 핸드백에서 프롬 액트 콘돔을 꺼내더니 풍선처럼 불어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어리석음. 소음. 현대의 바벨탑.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소리. (같은 책, 59-61p)


쿠르트 블루멘펠트 : "알았다, 한나. 미안하다. 내가 주제넘게 굴었구나. 네 아버지와 친했다는 생각에 그만. 네 말대로 이 임무에는 분명 위험이 따를 테고…."

한나 아렌트 : "괜히 죄책감 들게 하지 마세요." (같은 책, 76-77p)


한나 아렌트 : "엄마, 우린 지금 당장 독일을 떠날 거야."

한나 아렌트의 엄마 : "하지만, 얘야. 난 여권도 없는데 어떻게 하니."

한나 아렌트 : "괜찮아. 그런 건 이제 필요 없으니까."

난 이제 순수하지 않아. (같은 책, 89-90p)


내게 벤야민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성에 반대하며 모든 감정을 느끼는 스펀지 같은 사람이었으며, 아름다운 무질서를 닥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사상가였다. 벤야민의 습관 중에서 특히 멋있는 건 파리 구석구석을 한량처럼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는 것이었는데, 참여적이면서도 무관심한 그의 관찰은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그날의 여정을 말로 풀어놓을 때면 반은 구경꾼, 반은 연기자로 자신의 그런 역할에 완전히 몰두하곤 했다. (같은 책, 101p)


마침내 합리적인 논쟁을 벌이며 함께 대화를 이어갈, 지각 있고 진실만 말하는 상대를 찾아냈다. 나 자신이었다. (같은 책, 115p)


나는 기회를 포착했다.

한나 아렌트 : "제 말을 들으셔야 해요. 같이 나가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아무도 모르는 게 분명해요. 지금 다 같이 나가자고요!"

사람들 : "어떻게요?" "그냥 걸어 나가면 되죠." "그러다 잡히면 큰일 나요." "나가지 말라고 방송했잖아요." "명령 위반이에요." "파리는 여기서 어마어마하게 멀어요." "난 범법자가 되는 건 싫어요."

한나 아렌트 : "잠깐 내 말 좀 들어봐요. 지난 7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 안 나요? 여기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사람들 : "하지만 '자유 프랑스'는 여전히 자유 국가에요."

한나 아렌트 : "당신들이 믿는 프랑스는 당신들을 나치 손에 자유롭게 넘겨줄 거예요."

사람들 : "저 여자 말을 왜 들어? 화장하면 이런 일이 없을 거라던 여자잖아." "한나, 제발 모든 게 가라앉을 때까지 하루 이틀만 기다려요." "지금은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러워요."

한나 아렌트 : "혼란은 우리 편이에요. 하지만 이런 기회는 금방 사라질 거예요."

사람들 : "그럼 혼자 가요. 우린 하루 이틀 지나서 모든 게 잠잠해지면 따라갈게요."

난 아주 간단히 걸어나갔다! 6,800명의 여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프랑스의 무질서는 철저한 효율성으로 대체되었다. 귀르 수용소의 6,800명은 새롭고 강력한 독일제 강철 울타리가 세워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귀르 수용소의 6,800명은 또 다른 6,800명의 유대인 여자들을 맞아들였다. 그들을 실은 열차는 바덴과 자르팔츠 쪽 국경을 교묘히 넘어, 초고속 승진을 한 젊은 나치 친위대 장교의 시간표대로 정각에 도착했다. 그 장교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같은 책, 120-122p)


시장에 갔던 엄마가 어떤 소식을 가져왔다.
한나 아렌트의 엄마 : "방금 아서 쾨슬러의 집사람한테 들었는데 스페인 등산가들한테 금시계 하나만 주면 산길을 통해 프랑스를 빠져나가게 해준대. 식량이랑 국경 경비대한테 줄 뇌물까지 포함된 값이라더라."

발터 벤야민은 롤렉스 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공산주의자가 됐다고 절연당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었다.

발터 벤야민 :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돼."

한나 아렌트 : "뭐가요?"

발터 벤야민 : "난 이해가 안 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느니 자유 프랑스 정부에 직접 찾아가서 비자를 신청하면 안 되는 거야? 내 말은, 여긴 아직 프랑스잖아. 난 주요 인사들을 많이 안단 말이야. 소르본 대학의 학장이나 비블리오테크 관장하고도 평소에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라고. 이런 지인들은 전부 교양인이야.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기도 하고."

한나 아렌트 : "발터. 진정하고 들어봐요, 발터. 베를린에 있던 힐퍼딩과 브라이트샤이트 기억나요?"

발터 벤야민 : "내가 아는 이름들이군."

힐퍼딩은 당 기관지의 편집장이었고, 브라이트샤이트는 프린스 윌리엄 병원의 외과장이었다.

한나 아렌트 : "둘 다 독일에서 최대한 버텼지만, '수정의 밤' 사건이 벌어지자… …결국은 당신처럼 파리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미국 입국 비자를 발급받았어요. 힐퍼딩은 CBS 뉴스가, 브라이트샤이트는 하버드 의대가 스폰서를 해주었죠. 그래도 여전히 프랑스 출국 비자가 필요했어요. 주위에서는 서류를 위조하든지 뇌물을 쓰라고 했죠. 위조 아니면 죽음뿐이라고요. 하지만 친불파로 유명한 두 사람은 망설였어요. 대신 프랑스의 선의와 품위, 인류애를 믿기로 했죠. 그로부터 6개월 후… 이른 아침에 누군가가 브라이트샤이트와 힐퍼딩을 깨워서… 자유 프랑스와 점령된 프랑스 사이의 좁은 땅으로 데려갔어요. 둘은 각자 기둥에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추위에 떨었죠. 프랑스 동부 7월 아침으로는 드물게 쌀쌀한 날씨였어요." (같은 책, 128-131p)


동이 틀 무렵, 익숙한 얼굴 하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마르크 샤갈 : "한나, 블뤼허. 여전히 사이좋은 잉꼬부부네요."

한나 아렌트 : "마르크 샤갈! 리스본에 계신 줄 미처 몰랐네요."

샤갈은 잔에 남은 상그리아를 입에 털어 넣었다.

마르크 샤갈 : "배리언이 마지막 남은 프랑스 출국 비자를 내게 줬어요. 당신들이랑 친한 그 운수 사나운 발터 벤야민은 어쩌고 있어요? 괴짜지만 참 마음에 드는 친구란 말이죠."

한나 아렌트 : "얘기 못 들으셨어요?"

난 리스본에 오는 길에 포르부에서 들은 소문을 최대한 종합해서 샤갈에게 발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가득 찬 거대한 여행 가방을 끌고 산에 올랐다는 것. 그 원고가 자기 목숨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말했다는 것. 하지만 국경에서의 검문이 길어지자 그는 자신에게 내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건 손에 쥔 모른핀 알약뿐이었다. 블뤼허와 나는 포르부를 뒤져 엄격한 가톨릭 공동묘지에서 엉망진창인 묘비 아래 묻힌 그를 찾아냈다. 늘 반짝이던 샤갈의 눈동자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창백한 새벽 속으로 걸어 나가 배회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담뱃불을 붙인 다음, 더러워진 발터의 원고에서 끈을 풀어냈다.

한나 아렌트 : "때가 됐어." (같은 책, 144-146p)


"역사라는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있으며… 비참하게 깨진 거대한 돌무더기가 자기 발에서 자라나는 걸 보고 있다. 하지만 낙원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면 역사의 천사는 저항할 수 없이…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떠밀려간다. 우리는 그 폭풍을 진보라고 부른다."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中, 같은 책 150-151p에서 재인용)


한나 아렌트 엄마 : "어림없어! 그리고 블뤼허 자네. 한나는 벌써 일자리를 구했는데, 자넨 언제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건가. 아휴! 이렇게 많은 공과금은 처음 봐. 수도세, 가스비, 난방비, 전기세, 전화요금…."

하인리히 블뤼허 : "장모님, 저도 찾고 있어요."

한나 아렌트 : "엄마, 사위를 혼내려면 최소한 제대로 된 영어로 해요."

나는 영어 실력도 늘리고 돈도 벌 겸 매사추세츠의 한 가정에서 말썽꾸러기들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

블뤼허는 뉴저지의 플라스틱 공장에서 화학 폐기물을 퍼 나르는 작업을 겨우 맡게 됐다. (같은 책, 155-156p)


살로 위트마이어 바론 : "지금 우리가 말한 새로운 유대인의 역사에 관해 영어로 4,000자 분량을 써오면 우리 잡지에 실어주겠소. 진짜 뉴요커의 글처럼 써줘요."

한나 아렌트 : "그럼 제 경력은 폭명탄처럼 피어오르겠군요."

나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매일 밤 문 닫는 시간까지 뉴욕 공립 도서관에 머물렀고, 기차에서도, 강의 시간에도, 심지어 요리할 때도 글을 썼다. 프루스트부터 폰 클라우제비츠, 벤야민, 마르크스,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수많은 이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들어댔다. 나는 천장에 간 금을 응시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같은 책, 162-163p)


나는 미친 듯이 글을 써댔지만, 가짜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내가 가짜 포에니 전쟁을 벌인지도 3년이 지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독일의 방어선의 안쪽에 숨어 있던 이야기들이 처음으로 흘러나왔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집단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단편적인 소식들이 신문지면을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더 테이번의 단골들은 물론이고 블뤼허도, 심지어 나까지도 그런 소문은 믿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요?" "가짜 뉴스야." "프로파간다지." "아무리 히틀러와 수하들이라도 그런 짓까지는 안 해. 그들은 전문가야." "한나, 잘 들어요. 난 독일군 편에서도 싸워봤고, 그들을 상대해서도 싸워봤어요." "폰 클라우제비츠가 그런 일을 허락할 것 같아요? 어림없죠." "독일 장군들이 그런 계획에 동의할 리가 없어요. 전략적으로 따져보더라도 자원을 다른 데로 돌릴 이유가 없잖아요. 어마어마한 실책이죠. 인간이라면 그런 짓은 못해요."

하지만 1943년 여름, 대량 살상 공장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 심연의 문이 열렸다. 이전과 이후 사이에, 과거와 현재 사이에, 그때와 지금 사이에 매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겨버렸다. 우주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같은 책, 167-169p)


그러던 어느 날, 전보 한 통이 왔다.

한나 아렌트의 엄마 : "네 잘못은 아니야, 한나. 내 말 믿어. 하지만 난 이 세상에서 내 보금자리를 찾아야겠어. 일 열심히 해. 사랑한다, 얘야."

3일 후, 또 다른 전보가 날아왔다.

퀸 메리 호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함. 마르타 비어왈드 씨(한나 아렌트의 엄마)가 동벵골에서 2454km 떨어진 해역에서 사망하셨음. 고인의 명복을 빔. 큐나드 라인.

한나 아렌트 : "봐요, 마르틴(하이데거). 당신이 내놓은 해답이잖아요. 죽음이요. 진리가 죽음에서 나온다고 했죠. 이제 만족해요? 죽음은 아무것도 주지 않아요. 빼앗아갈 뿐이죠. 사람을 데려가 버린다고요. 사랑하는 사람을요. 그리고 우릴 외톨이로 만들죠. 죽음은 진리가 아니에요. 거짓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바다 한 가운데로 가서 거기에 그냥 가라앉어버려요. 영원히." (같은 책, 183-185p)


『전체주의의 기원』 덕분에 우리는 좋은 집으로 이사했다. 방 5개, 화장실 2개에 엘리베이터가 있고 도어맨이 상주하는 아파트로, 일부지만 강변 전망이었다. 나는 여기를 심연이 발생한 이유를 파헤칠 내 연구의 근거지로 삼았다. 연구 본부는 소파였다. 그리고 연구 방법은 회반죽 천장의 금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상대와 토론했다. 한나 대 한나로. (같은 책, 186p)


한나 아렌트 : "인류는 이렇다, 인류는 저렇다. 마르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인류가 아니에요. 인간들이죠. 한 명 한 명의 남자와 여자, 아이요." (같은 책, 208p)


세상은 아직 이 심연을, 공포가 왜 생겨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적인 감정이 공적 영역에 들어설 때 발생한다. 나는 내가 이해한 것을 모두에게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책, 218p)


나는 답을 찾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유가 아닌 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사유를 연습했다. 그리고 그걸 '철저한 사유'라고 이름 붙였다. (같은 책, 224p)


나는 '철저한 사유'라는 나의 비-교리를 들고 강연을 나섰다.

청중 : "그러니까 아렌트 부인. 그때그때 되는 대로 대처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한나 아렌트 : "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래야 해요. 제가 해드릴 말은 그것뿐이네요. 특효약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우리 안에 포함시키는 한 현재 진행중인 이 거대한, 솔직히 말해 엉망진창인 난장판을 히틀러나 스탈린에게 빼앗기는 일은 다시 없을 거예요." (같은 책, 225p)


법정에 들어간 나는 유리 상자 안의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은 맹목적이고 단조로우며 관료주의적인 그의 태도와 일치했다. 목격자와 피해자들이 줄줄이 증언하는 동안, 나는 아이히만이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가 뒤틀려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짚으로 만들어진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를 묘사하려면 기사에서 감정과 연극적인 태도를 최대한 절제하는 게 내가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을 공격하고,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베를린 동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배운 빈정거림과 반어법, 건조한 표현, 풍자 등에 의지해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다. (같은 책, 227p)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유리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이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출세지향적인 전직 청소기 판매원이 따분해하며 알맹이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프랑켄슈타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서 오히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한나 아렌트 :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같은 책, 228p)


여전히 적들은 나를 공격했고, 친구들은 나를 무시했다.

심지어 발터의 절친한 친구로 파리에서 우리와 함께 어울리곤 했으며, 나를 하이데거의 가장 영특한 제자이며 '훌륭한 여성이자 특별한 시온주의자'라과 부르던 게르숌 숄렘마저 나를 거부했다.

게르숌 숄렘 : "재판을 바라본 당신의 어조와 태도에서는 유대 민족을 향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 : "게르숌, 사랑은 사적인 거예요. 난 유대 민족을 사랑할 수 없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친구들 정도죠. 그런 열정을 공적 영역으로 가지고 나가면 오히려 더 많은 아이히만이 탄생하게 돼요."

이 책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존재의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을 분리해 건강하게 지키면서 현실에 대해 눈도 깜박하지 않은 채 계속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제멋대로 규정하거나 딱지 붙이려 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페미니스트들은 나를 사랑하고 혐오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나를 찬양하고 비난했다. 나는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을 비롯한 모든 개인을 지지했다. 나는 인권을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것들이 나치가 만든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정문에서 실종됐다고 선언하며 모든 인간에게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열렬하게 주장했다. 인간이 달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인류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조건인 지구에의 결속이 느슨해지면 인간성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의문을 제기했다. 치마는 점점 짧아지고, 머리는 점점 길어지고, 음악은 점점 시끄러워지는데, 정치가들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거짓된 행동을 했다. 시간은 내가 이미 오래전에 알아챘듯이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상실의 아픔은 벌어진 상처처럼 아물 줄을 몰랐다. "나는 나를 영입하려는 집단의 구성원은 되고 싶지 않았다"라는 그루초 막스의 말도 그리 큰 위안이 되지 않았다.

하인리히 블뤼허 : "5년 전에 당신은 나치를 '풍자'했다고 조롱과 비웃음, 괴롭힘을 당했는데, 이젠 그들에 관한 노래까지 나오고 있어!"

한나 아렌트 : "내가 너무 멀리 나갔던 건지도 모르겠어. 공포를 설명하려면 풍자적으로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왜냐고? 정말 미치도록 화가 났었거든.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진 거였으니까. 그냥 관습을 지키며 만족했어야 하나 봐. 아무것도 손상되지 않은 척하면서 입을 굳게 닫고 심연의 맞은편에 머물러야 했을지도. 아니면 나도 발터처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인리히 블뤼허 : "당신은 자살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던 거야."

한나 아렌트 : "하지만 괴로워, 블뤼허. 정말 괴로워."

하인리히 블뤼허 : "탄생이란 괴로운 거지. 하지만 삶은 단지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라는 하이데거의 유아론적인 확신에 짓밟히지 않고 그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삶은 끝없는 탄생이라는 걸 보여줬잖아. 의견, 행위, 사람, 남자, 여자, 예측 불가능성, 개별성, 자발성. 행위의 의미는 그 행위를 하는 사람조차 이해할 수 없어. 모든 것은 이야기야. 우리가 서로에게 그 남자가 이랬다, 그 여자가 이랬다고 말하는 이야기 말이야. 당신이 늘 말하듯이 이야기는 의미를 규정하려는 실수 없이 그것을 드러내게 해주니까. 하지만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신은 용서가 중요하다는 것도 보여줬어. 대신 용서하고 잊는 게 아니라 용서하되 기억해야 하지. 용서는 역사에 커브볼을 던지니까. 그리고 그건 당신이 항상 말하는 것처럼 역사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거야말로 인간이 운명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지.

우린 모두 저마다의 최대 속도로 무한하고 텅 빈 소용돌이 위를 거꾸로 달려가고 있어. 발에는 여러 색상의 채색 펜이 묶여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광폭한 무지개가 그려지는데, 무얼 그렸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나 펜을 단 채 거꾸로 달리고 있는)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린 무늬에 관해 설명을 듣는 것뿐이야."

한나 아렌트 :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거겠지."

하인리히 블뤼허 : "당신이 만든 게 아니야. 그저 운 좋게 그걸 발견한 거지." (같은 책, 229-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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