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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Jun 09. 2022

꿈을 꾸고, 밀고, 꾸미고.

안녕, "꿈". 오늘은 노래를 듣다가 네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어. "꿈을 꾸고 있나봐"라는 가사에서였어. 박효신 씨가 불렀는데, 'Home'이라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들어봐. 어쨌든, 거기서 "꾸다"라는 너와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어.


"꾸다"라는 친구는 어떤 친구야? 사실 네게서 직접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어. 어떻게하면 네게 닿을 수 있을지 묻던 내 질문에 너는 항상 침묵으로 일관했으니까. 그래서 나 혼자서 "꾸다"에 대해 생각을 해봤고, 오늘은 그에 대해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꾸다", 처음에는 "꿈"이라는 명사와만 어울리는 친구인 줄 알았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가 "돈"을 "꾸다"라고도 많이 쓰더라고. 돈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꾸어올 수도 있고, 일손을 꾸어오기도 하지 않을까. 어쨌든 "꾸다"라는 말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빌려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꿈을 "꾼다"고 하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인 거야. 그렇지 않아? 우리는 꿈을 꿀 때 나의 것이 아닌, 현실에 없는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그려내지.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지기도 하고, 그것이 결국은 '꾸어온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에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면서. 나도 열심히 꿈울 꾸어오곤 해. 내가 자유로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일을 선택하고, 부모님을 뵈러 갈 시간도 넉넉하고, 돈도 나 먹고 살만큼은 벌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을 '꾸어 와'. 혹은 어떤 회사에 들어갔지만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자아실현의 방향과 너무나도 적절하게 맞아떨어져서 주5일 출근이 그리 힘들지는 않은 내 모습을 '꾸어' 오기도 해. 난 그럴 때마다 누구한테 그런 꿈을 꾸어오는 걸까? 넌 누구에게로부터 온 거니?


혹은 그런 생각도 했어. 우리가 "꾸미다"라는 말도 많이 쓰잖아. 왜 우리는 꿈을 "꾸미다"라고 안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봤어. 너는 왜 "꾸다"와 비슷한 "꾸미다"와 친한 게 아니라 "꾸다"와 친할지에 대해서.


혹시 미닫이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어? '밀어서' 닫는 문이라고 해서 미닫이문이라고 불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꾸미다"라는 게 꿈과 함께 쓰이면 "꿈(을)미(ㄹ)다"라는 뜻이 될 수 있는데, 꿈은 그렇게 밀면 안 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꿈을 "꾸(ㅁ미)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너도 꿈을 밀어온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꿈이라는,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니고 기체도 아닌 그런 것을 억지로 밀다 보면 사람이 그 밀던 것에 빨려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


처음에 밀 때는 처음 만져보는 꿈의 감촉에 황홀함을 느끼지만, 이윽고 밀던 손부터 그 꿈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하지. 그래도 계속 꿈을 밀면 팔이 잠기고, 어깨가 잠기고 어느 순간 몸의 반 이상이 잠겼음을 깨달아. 그때조차 꿋꿋하게 꿈을 밀던 사람들은 결국 꿈 속에 온전히 잠기게 되지.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꿈에서 다시 빠져나오더라도, 이미 꿈이 온몸을 적셔서 그 꿈이 다 마르기 전까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고? 글쎄, 나도 지금 그렇게 꿈을 밀고 있는 사람이어서일까. 어디까지 잠겼는지 모르겠어. 이제는 너와 이렇게 대화까지 할 지경이잖아.


혹은 그런 생각도 해. "꾸미다"라는 단어는 '무언가가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것들로 장식하는 행위'를 일컫기도 하지. 하지만 우리는 꿈보다 더 아름다운 형태를 찾아낼 수 있을까?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물어봐. 당신은 그 꿈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상상할 수 있나요? 가능하다면 그걸 얘기해주세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얘기할 거야. 글쎄요, 일단 이 꿈만 이루어져도 좋겠는데요.


간혹 그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알고 보면 자신이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진짜 꿈이 따로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아. 다만 그것이 너무 비현실적인만큼, 딱 그 만큼 말도 안 되게 최대한으로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는 그 꿈의 소박한 일부만 얘기하고 다니던 사람들인 거지.


그러므로 꿈을 "꾸민다"는 말은 그 자체로 어폐가 있는 말인 거야. 어떻게 최상으로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있겠어. 그런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기껏해야 이렇게 말하는 정도가 최선이겠지. "일단 그 꿈이 이뤄지고 나면 다른 꿈을 또 꾸긴 하겠지."


그래. 이게 항상 나의 물음에 답이 없는 너에 대해서 오늘 내가 생각한 바야. 정확히는 너("꿈")가 아니라 네 친구("꾸다")에 대해서 생각한 결과지. 어떻게 생각해? 진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너가 "꾸다"라는 친구와 친한 거, 맞지?


네가 내가 말을 하는 친구였으면, 이런 글을 쓰기 전에 사전을 찾아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책을 많이 읽은지도 너무 오래 된 사람이고, 언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니까 그런 겸손함이 필요했을지도 몰라. 근데 그건 한편으로는 너무한 요구라고 생각하기도 해. 혹시나 사전을 찾아봤는데, "꾸다"라는 단어가 '몇 년 내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다'라는 말이면, 내가 그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너져내릴지 무서워. 적어도 내게 있어서 "꿈을 꾸는 행위"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거든. 꿈에 가까워지는 길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고, 초라한 결과들 앞에서 웃음이라도 짓기 위해서 애를 얼마나 써야 하는지.


그래서 미안해. 난 "꾸다"라는 단어가 실제로 어떤 말인지 알고 싶지 않아. 더 적확하게 이야기하면, 어떤 말인지 알기가 두려워. 이것도 혹시 꿈을 밀다가 그 꿈 속에 빠져버린 사람들이 갖게 되는 두려움이니? (혹시 나는 꿈 속에 갇혀버린 나머지 너는 항상 말을 걸고 있었지만 내가 듣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나중에 꿈을 정말로 부분적으로라도 이룬 날이 찾아왔다고 느끼게 되면, 드디어 꿈을 꾸어만 오던 내가 그 꿈을 갚아냈다고 느끼게 되면, 그때 "꾸다"가 사전에 어떻게 적혀있는지를 찾으러 갈게. 오늘은 그냥, 네 친구 "꾸다"에게 안부나 전해줘. 어떤 이유에서든 꿈을 그만 꾸어오고 싶은 한 친구가 안부를 전했다고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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