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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Mar 08. 2023

서로 돌봄

워킹맘 3달 후기


요 며칠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복직 후 회사에서의 스트레스와 수면 패턴이 꼬인 탓이다. 복직 직후 나는 뽕이 잔뜩 차 있었다. 10년 만에 바뀐 업무, 사람도 많이 만나고 성장도 할 수 있는 부서, 복무도 자유롭고 사람들도 친절한 팀 분위기. "우리 팀은 일도 재밌고 사람도 다 좋아요!"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동의하지 않던 그 분위기에서 눈치챘어야 하는데. 복직 후 3달 정도 지난 지금, 누군가 내게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죽겠어"라고 답하고 있다.



업무 자체는 여전히 재밌다. 내가 잘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일이고 이 역경이 지나고 나면 시나브로 성장해 있을 내 모습에 대한 기대도 있다. 대체 왜 힘든 거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나마 비슷한 답을 하자면 회사 속의 인간 군상이 지긋지긋한 것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육아휴직 동안 나의 세계는 오로지 아기뿐이었다. 원래 친하던 친구 외엔 새로운 육아동지 한 명도 만들지 않은 내겐 아이와의 관계만이 유일했다. 일방적이면서도, 오롯이 내가 한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지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고 감수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회사생활이 힘든 것은 내가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내가 믿은 만큼 응해주지 않는 사람들, 예상하지도 컨트롤할 수도 없는 갑작스러운 공격들 때문이다. 아이와 시끄럽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내게 회사생활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들의 군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요 근래 한 달은 워킹맘에게 더욱 가혹했다. 기존에 도보 15분 거리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도보 1분 컷의 단지 내 어린이집으로 옮기게 됐다. 하지만 2월 말에는 기존 어린이집에서 갑자기 공사를 한다며 휴원 공지를 내린 탓에 2주 간 어린이집에 가지 못했고, 3월 초에는 새로운 어린이집 적응 기간으로 하루에 30분에서 1시간가량만 보낼 수 있었다.


남편과 나의 연차를 쏟아붓고, 그나마 근무 시간 조정이 가능해서 이리저리 시간을 짜 맞추며 '보육 시간표'를 짰다. 그마저도 둘만으로는 불가능이라, 하원을 돕던 친구에게 하루 온종일 아이를 봐달라고 하거나, 3시간 거리에 사는 아빠에게 SOS를 치기에 이르렀다.


가정보육을 온전히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시간표를 짜는 그 과정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남에게 폐를 끼쳐야 하고, 마치 아이가 '숙제'인 것처럼 취급받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인데 그 자체로 부모인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 아이가 내 모든 시간을 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 상황.


나는 복직 후 처음으로 '재택 육아'를 해보았는데, 하필이면 일도 몰아치는 탓에 농땡이 피울 틈 없이 일했다. 사무실에서는 그나마 동료들과 커피타임도 가지고 수다도 떠는데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일하니 화장실 갈 틈도 없다. 아이에게는 계속 TV를 틀어주고, TV마저도 지루해져 "엄마 놀아줘요!" 하는 아이의 말을 몇 번이나 무시하며 그렇게 일을 해야 했다. 조금은 아이에게 눈길을 주며 일해도 됐는데, 복직 후 긴장감이 아직 빠지지 않은 초보 워킹맘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일을 해댔다. (오늘도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찌어찌 난관을 극복했다. 극복했다기보다는 그냥 휩쓸려 지나간 시간이지만 어쨌든 다음 주부터는 나름 안정적인 시간표로 보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어제는 매 월 가지는 독서모임이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책 소개보다는 근황 공유 및 고민 상담 시간을 길게 가졌다. 한참 수다를 떨고 각자 준비한 책을 소개하는데, 이상하게도 책의 내용들이 서로 연결된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엄마를 산책시키는 방법>이다. 엄마의 시선이 아닌, 아이의 시선에서 두 사람의 산책 과정을 담았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 산책을 나서고, 내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돌아오면 한껏 신난 아이와는 달리 한껏 지치곤 한다. 하지만 그 책에선 항상 바쁘게 일하는 엄마를 산책시키기 위해 아이가 산책을 제안하고, 추운 날씨에 엄마가 목도리와 장갑은 잘 챙겼는지, 산책 중에 엄마가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확인한다. 이 책이 유독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아이 역시 나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최근 한 달간 내 모습은 어땠을까. 지긋지긋한 인간 군상에 지쳐 웃음기가 없어진 얼굴.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동동거리며 근무 시간을 이리저리 쪼개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누군가에겐 감사 인사를, 누군가에겐 사죄의 말씀을 드리는 모습. 아침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지고 나서,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만나는데 말로는 반갑다고 하지만 한껏 지쳐 보이는 얼굴. 집에 와서도 계속 누워서 쉬려고만 하는 모습.


아이에게 비친 내 모습을 상상하고 나니, 아이가 내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떠올랐다. "엄마 많이 힘들었어요?", "엄마는 양말 신었어요?", "이거를 먹어야 몸이 튼튼해져요."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챙김 받으면서 들었을 말들을 온전히 내게 돌려주는 아기. 아이는 나를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 사람이 나를 아껴주고 있음을 깨달은 그때가 아닐까. 내가 잠 못 자며 스트레스받던, 모든 일상 속에서 우리 아기는 나를 끊임없이 돌보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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