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3박 4일 홀로 여행을 떠났다.
지난 4월 내가 먼저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고, 그 보답으로 당신도 가셔라 말하니 두어 번 거절하다가 여행 계획을 세워 떠났다. 나 역시 남편과 똑같이 휴가를 내고 독박육아를 시작했다. 독박육아는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기에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첫날은 친구와 아침부터 영화 감상 후 카페, 맛집에 방문하고, 아이와 하원하고 같이 놀러 간다. 밤에는 언니네 가족이 와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낮에 떠난다. 둘째 날은 친구네 가족이 와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낮에 떠난다. 셋째 날은 친구가 와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아이의 등원과 함께 헤어진다. 휴가 마지막 날 아이가 등원하고 나면 나는 예약해둔 미용실에 방문한다. 아이가 하원하면 집 근처 공원에 가서 멋지게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이 중에서 내 계획대로 된 건 딱 하나였다. 모든 약속이 취소되고, 변경됐다.
나는 극한의 계획쟁이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가급적 일주일~한 달 이전에 미리 잡는 편이고, 대단한 문제가 없다면 내가 먼저 약속을 취소하진 않는다. 원래 이번 휴가에 잡혀있던 약속이 있었는데, 친구가 날짜를 착각하면서 취소되자 곧장 다른 약속을 잡아 나의 계획을 원복(?)시켰다. 2년 간 육아휴직을 쓰면서 독박육아의 무서움을 한껏 느꼈기에 가급적 혼자 남지 않기 위해 애써 약속을 가득 잡았다.
첫날의 계획은 친구가 갑자기 탈이 나면서 취소되었다. 아이의 등원 후 곧장 나갈 예정이었기에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갑자기 약속이 취소되었다. 급히 영화표와 식당 예약을 변경했다. 갑자기 생긴 혼자만의 시간에, 빠르게 계획을 수정하여 밀린 일을 했다. 밥도 대충 먹고 일에 집중하니 금방 아이 하원 시간이 되었다.
그 사이 친구는 컨디션을 회복해, 오후에라도 만나자고 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급하게 한강공원 나들이를 계획했다. 예정에 없던 장을 보고, 돗자리를 챙겼다. 어느 한강공원을 갈지 만나서 고민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선택하고 그렇게 공원을 향했다.
갑자기 방문해서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날씨는 너무 덥지 않게 적절히 선선했다. 급히 나오느라 아이 장난감 하나 챙기지 못했지만 친구가 아이를 위해 사온 비눗방울 기계가 엄청나게 훌륭했다. 드라이버가 없어 건전지를 넣지 못할 뻔했지만, 친구부부가 애써 드라이버를 빌렸다. 무언가 엉성했지만 우리는 꽤나 행복한 오후를 보냈다.
그날밤 방문하기로 했던 언니네는 급한 일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 혼자 맞은 둘째 날 아침에는 아이와 어떻게 오후까지 버틸지 고민했다. 여기저기 아이와 갈 수 있는 곳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날도 예상과 다르게 아이는 밥도 먹지 않고, 낮잠도 자지 않았다. 다행히 친구의 방문은 취소되지 않았다. 예정보다 늦어지긴 했지만 우리는 각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별다른 기대 없이 방문한 박물관에는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공간이 있었고, 우리의 아이들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재밌게 놀아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우리 아이가 먹은 것을 토해냈다. 다행히 심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속이 답답하다며 불편을 호소했다. 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자, 친구가 능숙하게 약국을 찾아 전화를 했다. 주말의 늦은 시간이라 근처에 문 연 약국은 딱 하나였다. 친구의 지시에 따라 아이는 친구에게 맡기고, 나 홀로 약을 사러 다녀왔다. 아이는 약을 먹고 조금 칭얼대다 잠들었다.
겨우 상황이 진정되어 정신이 돌아오니 마음이 풀어졌다. 친구와 늦은 밤까지, 얼굴이 아플 정도로 웃으며 수다를 떨다 행복하게 잠들었다.
셋째 날 역시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친구네와 근처 공원에 가서 놀 계획이었으나, 날씨가 너무 더웠다. 아침에 잠시 집 앞 놀이터에 나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급히 복귀했다. 이상하게 텐션이 낮은 우리 아이를 살펴보니 열이 나기 시작한다. 힘 없이 내 무릎에 기대 누운 아기를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싶었다. 아이에게 감기약을 먹이니 잠시 후 고롱고롱 잠들었다.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첫날 미뤄두었던 식당 예약 역시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을 같이 가기로 한 친구에게 아이 컨디션 보고와 예약 취소를 안내하니, 본인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늘 우리 집에 방문할 수 없다는 답이 왔다. 미용실에서도 연락이 왔다. 내일 예약 예정이셨는데, 디자이너 사정으로 날짜 변경이 필요하다고.
이렇게 연달아 모든 약속이 취소될 수 있나. 그동안 무수한, 무리한 일정을 짜며 살았지만 이렇게 약속이 많이 취소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독박육아를 피하기 위한 계획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었다. 연달아 우수수 계획이 변경되자 남은 하루, 휴가 마지막 날 계획을 잡기 싫어졌다. 계획 세우면 뭐 하나, 또 취소될지 모르는데. 와중에 남편에게 3일 만에 전화가 왔다. 자신의 남은 여행 계획을 줄줄 읊다가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자 "빨리 올라가야 되나?"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계획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셋째 날의 오후는 무료하고 답답했다. 오늘의 계획도, 내일의 약속도 틀어지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아이는 자고 일어나 계속 놀고 싶다고 칭얼대면서도 놀아주려고 하면 금방 울어버렸다. 별안간 장난감 빠방이를 타자고 떼를 써서, 급히 양말을 신기고 밖으로 나섰다. 빠방이에 태우고 하염없이 집 근처를 돌았다. 집 앞 놀이터에는 계획되지 않은 외출을 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 부모들이 가득 있었다. 다들 나처럼 어딘가 초점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왜 그토록 독박육아를 두려워하며 이것저것 계획을 잡아댄 것인지 갑자기 허무해졌다.
놀이터에는 초등학생 아이 무리가 앉아서 쉼 없이 떠들고 있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돈 쓰다 보면 지겹지 않을까. 돈이 없어서 길바닥에 나앉는 것보단 낫지. 선의의 거짓말은 옳은 걸까? 부모님도 산타 있다고 거짓말하시잖아. 사람은 왜 사는 걸까? 엄마아빠가 낳았으니까 사는 거지. 연관성 없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떠들던 아이들은 "또 얘기할 거 없나?"라며 또 다른 철학적 주제를 꺼내 들었다.
아이들의 철학적 토론에 감명을 받은 나는, 홀로 철학적 고뇌에 빠졌다. 인간은 왜 계획을 하는가, 내 인생은 이제껏 계획대로 살아졌나, 왜 계획이 틀어지면 기분이 안 좋을까,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가. 나의 지난 3일은 계획대로 된 일이 없었지만 최악의 시간은 아니었다. 어쩌다 놀러 간 한강공원은 온도, 습도, 공기 모두 완벽했다. 친구 아이와 예정 없이 방문했던 박물관은 우리 아기들이 좋아하는 작은 소품들로 가득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눈에 보여서 충동적으로 주문했던 일식집의 밥은 아주 맛있었다. 할 일 없어서 나온 집 앞에서는 우리 아이보다 어린 아기를 만났고, 인사를 나누는 아기들의 모습이 몹시도 귀여웠다.
이제껏 나는 대체로 계획대로 잘 살아왔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나의 일상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계획은 대체로 나의 의지에 따라 수행된다. 누군가와 잡은 약속이 상대방에 의해 변경되더라도, 이 약속 자체를 취소할지, 언제로 바꿀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 육아는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다. 아이가 언제 똥을 눌지, 내 계획을 잘 따라줄지, 요즈음 그랬듯 2시쯤 낮잠을 자줄지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고 계획대로 움직여 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불행했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의 매일, 매시간은 아이에 휘둘려 예상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우리는 순간순간 그럴듯한 대안을 찾았다. 그다지 좋지 못한 선택을 할 때도 많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우리의 일상은, 나의 인생은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무수한 계획을 잡고, 갑자기 취소되고 변경되고, 어느 날은 아주 좋은 차선책을 찾고, 어떤 날은 최악의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변경된 오늘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얻은 것, 내가 만족했던 것을 찾아낼 것이다. 나의 하루를 최악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 하루가 실제로도 꽤나 괜찮았으니까.
'이렇게 안 풀릴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꼬이는 날이 있다. 요소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 대단히 잘못한 사람도 없다. 그저 그냥 상황이 그랬을 뿐이다. 계획주의자가 아닌 사람에겐 참 별것 아닌 일들의 연속이지만, 대단한 계획주의자에겐 철학적 고찰까지 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저 바쁘게 아이와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고찰을 했다. 오히려 좋아. 좋은 시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