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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Feb 27. 2021

상처는 덮는다고 아물지 않는다

영화 세자매

아내와 크게 다퉜다. 대화가 끊어지고 서로 소 닭 보듯 하면서 지낸 지 2주가 넘었다. 싸운 첫날은 '내가 이런 여자와 어떻게 30년 가까이를 살았나' 하다가 며칠 지나니 그냥 좀 미운 정도로 누그러지고, 시간이 더 지나니 '에이, 내가 좀 참을 걸...' 하며 화난 마음이 사라졌다. 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또 다른 갈등이 생기면 아내나 나는 이번에 가지고 있었던 섭섭한 마음을 다시 꺼내어 상대방에게 내팽개칠지도 모른다.


여자들의 기억력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큰 아이가 태어났을 무렵 어머님과 둘이 주말에 나들이 비슷한 것을 간 적이 있었는데 아내는 아직도 그 25년 전의 섭섭함을 꺼내 놓곤 한다. 하물며 어려서 당했던 가정폭력 같은 것이라면 그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닐 테다. 웬만해서는 치유되지 않는다.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아직 태아(胎兒)의 상태일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아이를 지워라'는 말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상처들을 치유받기 위해서는 완전하게 용서를 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에게 진정한 사과를 받던가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서는 평생 가슴속에 남는 경우가 많다.


상처는 의도적이지 않을 때도 얼마든지 생긴다.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마음에 면역력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기 쉽다. "사진 잘 나왔네요." 하는 말에 "흥, 실물 보니 못생겼죠?"라는 반응이 나오고, "실물이 훨씬 예쁘시네요!" 하니 "저 사진빨 안 받는 거 알아요." 하고 되받는다. 나 또한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뭘 저런 조울증 싸이코가 다 있어?' 하며 꽁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유산 문제, 이해관계, 편애, 조상들 제사 등등의 문제로 형제간에, 부모 자식 간에 등 돌리고 원수처럼 살아가는 가족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원수 같은 형제'가 될지언정 아이러니하게도 형제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누가 네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해 봐. 그게 만일 이웃이면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걸겠지. 그게 친구면 치고받고 싸우거나 절교를 할 거야. 그런데 그게 형제라면 미워하고 안 보고 살 지는 몰라도 형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피를 나눴다는 건 그런 거야."


이집트계 미국인인 내 친구의 말이다. 가족이라는 그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코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가 보다.





김선영, 문소리, 장윤주가 열연한 영화 '세 자매'는 그런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문소리의 연기야 이전부터 검증이 됐지만, 그동안 '응답하라'로 무명시절을 벗어나 사랑의 불시착까지 명품조연 연기를 이어가고 있는 김선영의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 당연히 여자가 연출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감독이 수염을 시커멓게 기른 남자라는 데 또 놀라고, 김선영이 이승원 감독의 부인이라는 데 한 번 더 놀랐다. 장윤주는 힘을 조금만 빼면 훌륭한 연기자가 될 듯하다. 그래도 지난번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서보다는 한층 여문 연기를 보여 주었다.


피를 나누었고, 누구보다도 가깝지만 또 제일 상처 받기 쉬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 영화 세 자매에서는 그런 상처와 아픔을 겪으며 성장한 세 자매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 때문에 여전히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 준다. 상처는 자매들만 받는 것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영화는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나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세 자매가 더 이상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 않고 그 상처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할 것 같다는 실마리만 살짝 보여줄 뿐이다.


희숙, 미연과 미옥이 아버지의 생일에 찾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상처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교회 장로가 되어 있는 - 어릴 적의 희숙(김선영)과 진섭(김성민)을 학대하던 - 아버지가 "난 그때의 내가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모습은 마치 '밀양'에서 딸을 유괴해 살인한 도섭(조영진)이 용서하겠다고 찾아온 신애(전도연)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하고 영성 충만한 모습으로 말하던 장면과 오버랩된다.


박도섭의 한마디에 신애의 유리 같은 믿음이 산산조각 나듯, 남편의 외도에 미연의 평정심과 꼿꼿함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세 딸들이 다분히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끄집어내어 내던질 때는 나도 모르게 110% 몰입했다. 이승원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고 하는데 그 섬세함과 거침을 넘나드는 언어들이 뛰어난 세 배우들의 대체 불가한 연기력을 타고 관객들에게 먹먹함과 뜨거운 공감으로 전해진다. 스토리는 그리 특이할 것 없이 담담하게 풀어 가지만 관객들에게는 아주 짙은 여운으로 남는 영화다.




상처는 그저 덮는다고 아물지 않는다. 감춰지지도 않고 유전되며, 전염된다. 우리는 상처를 감추는 일에 아주 능숙하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서한다고 하나 묻어 놓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내 몸에 면역력이 떨어지면 언제 어디서 대상포진(帶狀疱疹) 균처럼 피부를 뚫고 밝으로 튀어나와 나를 고통에 몸부림치게 할지 모른다. 상처를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곪은 것을 짜고 약을 발라야 한다. 살에 생긴 상처야 혼자서도 치료가 되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저절로 낫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에 얽매여 산다면 결코 행복한 삶은 살 수 없다. 분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용서’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자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그 믿음에 전적으로 의지하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여순사건(1948) 때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맞아들인 손양원 목사(1902-1950)의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예화일 뿐, 누가 내 아이들을 죽인다면 나는 결단코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용서란 자신을 포기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상처보다 더 처절한 고통과 인내를 동반하지 않고는 진정한 용서를 하기 란 어렵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그 상처가 뚫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내가 강해지는 것이다. 단순한 정신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귀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온통 몰입하는 것이다. 자기애가 강하고 자아의식이 꼿꼿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던지는 말들에 상처를 덜 받는다고 한다. 내가 아주 돈이 많다면 누가 가난뱅이라고 놀리는 것에, 내가 아주 미인이라면 못생겼다고 하는 말 등에 그다지 대미지를 입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건 또 말처럼 쉬운가.


세 번째 방법은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다. 갈수록 태산이다. 누구에게 정말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를 바랍니다.'라고 사과해 본 적이 있는가? 사과라는 것이 받고 싶은 마음만 있지 누구에게 진정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내게 흠집을 낸 사람이 전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둘째가 열 살 때쯤인가, 녀석을 심하게 야단치고 때린 적이 있다. 야단친 것 까지는 몰라도 때린 것은 너무 했다 싶어서 아이 기분을 달래 주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계속 화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내게 슬그머니 쪽지를 들이밀었다.


"Dad, I know you're mad at me. And I did wrong. But I love you, dad. It is one thing never change (아빠 화난 거 알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렇지만 아빠 사랑해요, 그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열 살짜리 아이만도 못한 나를 얼마나 자책했는지. 평생 누구에게 우리 둘째만큼 마음을 울리는 사과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과라는 게 그만큼 어렵다. 사과를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영화 '세 자매'의 결말에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 대하여 툭 제시한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른 방법은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다. '나 이렇게 아프니 알아줘' 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상처 받은 부위를 공기 중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따갑고 아플 것이다. 상처가 덧날 수도 있지만 상처 자체보다 그걸 감추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과정에서 내가 더 상하는 손해를 보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상처를 낸 사람에게 '당신이 가해자요' 하고 알려줄 수 있다. 상처를 드러냈으니 내게 다들 조심할 것이다. 내가 아픈 것을 인정하니 도움의 손길들도 내밀어 줄 것이다. 상처는 그렇게 묻히지 않고 천천히 아물 것이다. 흉터로 남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내 일부이니 사랑하고 어루만질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 살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도 프라이데이가 없었다면 살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한다면 부딪혀야 한다. 옛말에 좋은 일은 감추고 병은 자랑하라고 했다. 상처를 입으면 아프다고 개엄살을 떨어야 한다.


"나 아프다구, 나 죽는다구!"


희숙의 절규처럼.





* 타이틀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제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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