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man with yellow smile Nov 12. 2022

구겨진 나를 다림질하는 시간

보스턴, 미국 [Trident Booksellers & Cafe]

나는 매일 구겨진다.

제3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빠서, 나 같은 걸 구길 시간 따위는 없다.

보통 나 자신을 구기는 건 결국 나다.


별 의미 없는 남의 말과 거기 반응한 나의 열등감에, 구김 하나 추가.

스스로 한 사소한 다짐 하나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구김 하나 추가

월등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를 보며 커지는 좌절감에, 구김 하나 추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구김이 하나씩 추가되다 보면 금요일 즘이 되면 만신창이가 되어있다.

구겨질 수 있다. 괜찮다.

그러나 그걸 매번 다림질하는 신념과 조금의 시간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매주 금요일, 해가 지고 나면 항상 가는 곳이 있다.

학교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Newbury St에 있는 Trident Booksellers & Cafe.

1층은 항상 음식 먹는 손님들과, 책을 고르는 손님들도 북적거리는데,

의외로 2층은 널찍한데 사람이 별로 없는 편이다. 특히 금요일 밤엔

항상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주로 따뜻한 캐모마일 티와 고구마튀김을 시켰다.

주전자에 한가득 차를 주고, 뜨거운 물은 언제든 리필이 가능하다. 여기 고구마튀김 또한

입을 덜 심심하게 하기에 제격이다. 보스턴 특유의 차가운 바람 때문에 창문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지만,

냉기를 머금은 창가 자리는 따뜻한 티와 함께라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두 시간 정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걸 한다. 알차게 쓰는 시간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에서 가장 내 멋대로 시간을 쓰는 것, 젊어서 유일하게 낭비할 수 있는 건 시간뿐이다.

매주 금요일 두 시간씩 적극적으로 낭비를 했다.


처음엔 주로 창밖에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잔뜩 웅크린 채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  

손끝이 빨개져 있는 버스킹 하는 색소폰 부는 사람 (아마도 버클리 친구이지 않을까?), 맞은편 유니클로에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 나오는 사람들,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넘실거리는 모습.

그렇게 흥미로운 풍경은 아니지만, 멍하게 창밖을 볼 수 있다는 건 젊음의 특권을 마음껏 누린다.

다들 바쁘게 오가느라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도 없을 터라, 대신 내가 봐주어야지.

창에 좀 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미 깜깜해져 버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역시나 별거 없다. 까맣다.


그리고 글을 읽는다. 물론 유튜브가 더 간편하고 재밌지만,

글은 더 고차원적인 상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음악을 감상할 때 보다 더 다채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는 보통 장면이나 색, 감정들이 펼쳐지는데, 글을 읽을 때면 글 속의 장면이나 색, 감정들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숨소리, 스무 살 여름의 풀내음, 따끈한 어묵을 간장에 찍어 먹는 맛, 떨어지는 비가 머리카락들을 적시는 느낌, 등 세심하고 다채로운 오감들을 좀 더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달까? 글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 주로 김연수 작가의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연수 - 청춘의 문장들


이 날 마음에 들어왔던 문장은 이 것이었다.  내 취향(?)이 조금 파악되지 않는가?


글을 읽고 난 뒤에는 글을 쓴다. 일기처럼 매일을 기록하고 싶은데, 게을러서 그게 잘 안된다. 마음먹고 매년

도전을 하지만 결국 하루 빼먹는 날이 생겨버리면 뭔가 김이 새 버려서, 오히려 더 안 쓰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작심삼일 생각을 하면서, 3일에 글을 한 번은 쓰자고 생각하고 편하게 쓴다. 재미없는 내 글이

돈이 될리는 없고, 그렇다고 작품이 될리는 더더욱 없다. 그냥 내가 썼던 글들을 시간이 지나서 보면

신기 해서 자꾸 적어두고 싶어 한다. 이 글도 나중에 다시 읽게 되면 색다른 느낌일 것이다.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것들은 나의 구김을 펴준다.

보통 대부분의 하고 싶어서 하는 것들은 ‘무익' 하기 때문에 ‘무해’ 하다.

나의 꿈은 이런 ‘무익'한 시간들로 하루를 꽉꽉 채워 사는 것이다. 말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그냥 ‘놈팡이'다.

먹고 놀고 자고, 그냥 그러고 싶은 거다.


몇 년이 지나고 여기 Trident Booksellers & Cafe에 와도 똑같을 것 같은 느낌이다. 보스턴이 그런 도시다.

뭔가 다 변해도 여기만큼은 그대로 있어줄 것만 같은 도시. 헤어지기도 전에 그리워지는 곳.


매주 금요일 Trident Booksellers & Cafe에서 구겨진 나를 다림질하는 시간.


themanwithyellowsmile


Trident Booksellers & Cafe 창가자리

Trident Booksellers & Cafe

338 Newbury St, Boston, MA 02115

작가의 이전글 잎이 떨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