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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Mar 03. 2023

나약함으로부터 삶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 비평문

나약함으로부터 삶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레미





  인생은 선택의 나열이자 그 결과의 총체이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으로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한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골몰하는 것은 성공적인 결과에 대한 희망보다 실패의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는 나를 설명하는 최종적 상탯값이므로 그 무게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는 종종 결과 자체보다 선택의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곤 한다. 이는 결과가 아닌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두려움의 감각. 인간은 왜 그것과 분리될 수 없을까.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 안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결국 인생의 안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는 수백 개의 다중세계를 오가며 이 지친 질문들로부터 잠식당하지 않을 ‘고유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PART1: 나약함


   인간에게는 두 가지 생존 능력이 있다. 첫 번째는 나약함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나약해서 날 때부터 물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기린처럼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오리처럼 생후 2주가 되면 수영에 필요한 기름막이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신체 기능을 어느 정도 학습하고 나면 나약함의 새로운 차원을 마주한다. 스치는 감정, 터무니 없는 상상, 크고 작은 의사결정, 하루를 구성하는 이 모든 정신 작용에서 우리는 매 순간 나약함을 느낀다. 생면부지의 유명인에 느끼는 시기의 순간,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거울과 먼 자리에 앉고 싶은 순간, 복권 당첨을 상상하다 복귀한 현실에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자주 원하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런 작은 부끄러움의 스파크는 너무 자연스럽게, 자주, 막을 수 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수치심에 취약하다. 부족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존재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느끼는 두려움은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동기가 된다. 나약함은 두려움을 통해 생존에 기여한다. 최선 혹은 차악을 선택하려는 숙고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의식한 행위이다. 여기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과 자체보다 부정적 결과를 만들어낸 자기 존재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실패는 두렵고 선택은 불안하다.

선택이 불안한 또 다른 이유는 기회가 한 번뿐이라는 것에 있다. 한 번뿐인 기회를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현실이 된다면? 이를 확인시키듯 영화는 다른 선택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에블린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실패한 에블린’은 그 삶들을 경험하며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현재의 상태를 한탄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실패한 에블린’의 존재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 혹은 최악일까?

  그 에블린은 왜 살아야 할까?





PART2: '있음'과 '없음' 사이


  에블린은 다중 세계로의 점프를 통해 다른 에블린들의 삶을 본다. 다른 에블린들의 선택과 결과를 본다. 어떤 에블린은 웨이몬드와 함께 하지 않는 삶을 통해 배우로 성공한다. 어떤 에블린은 다중 우주의 존재를 밝혀 점프 통로를 발견한 박사가 된다. 그러나 영화 속 에블린들은 점차 성공과 실패라는 직선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이를 통해 ‘선택과 결과’의 의미가 확장된다. 웨이몬드와의 사랑이 중요했던 에블린들 외에, 너구리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세계, 손가락이 소시지인 종이 자연 선택된 세계, 돌이 된 세계의 에블린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블린이 다중 우주의 존재를 알게 된 영화 초반, ‘모든 것을 실패한 에블린’은 아버지와 웨이몬드를 사이에 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한 에블린을 보며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품는다. 그리고 점차 모든 곳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에블린들을 전부 경험한 에블린은 변수로 가득한 세상 속 어떤 선택의 결과도 완벽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여기, 에블린 보다 앞서 그것을 깨달은 존재가 있다. 조부는 자신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투하던 모든 선택의 끝은 부질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베이글을 만든다. 그가 발견한 덧없음은 세상에 대한 배신감과 자책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다. 그는 이 발견을 통해 지난 선택과 결과의 의미를 전부 상실하고 만다. 



끝없는 허무주의에 갇힌 조부 나름의 해답은 베이글이다. 모든 선택이 ‘개허접한 쓰레기’가 되는 세상에서 그 의미 없음을 깨닫고 텅 빈 상태가 되는 무한한 시공간.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종국에는 존재의 ‘있음’마저 포기하게 되는 시공간 말이다. 

  이 베이글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베이글은 어떤 특별한 사건에 의해 블랙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적인 선택과 좌절이 반복되고 허무함에 조금씩 잠식되던 어느 날 아침, 브런치로 먹었던 베이글이 무의미의 세계를 깨웠을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김 같은 것이 아닐까. 냉장고에 있던 재료들을 김에 올려 무상하게 말던 어느 날, 문득 그 김에 붙잡고 있던 모든 의미를 얹어 사라지게 한다면. 그렇게 김을 블랙홀로 만들며 안광을 잃은 수많은 조부 투바키들이 우리 주변에 실존하고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다시 에블린으로 돌아가 보자. 조이와 같은 덧없음을 목도한 에블린은 또 다른 조부 투바키가 되었나? 그렇지 않다. 에블린은 이 덧없음의 끝을 베이글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선택의 연속성이 의미하는 삶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영수증 결제 품목을 분류하는 사소한 순간조차 여러 선택이 존재하듯 그런 선택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배우로 성공한 에블린 역시 자신의 선택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을 실패한 에블린의 삶은 최악도 최선도 아닌 고유한 상태로 존재한다. 즉, 모든 것을 실패한 에블린은 없다. 





PART3: 사랑


  알 수 없는 변수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인간 개인은 나약하다. 그 나약함을 다독이고 허무주의에 잠식당하지 않을 힘으로 우리는 두 번째 능력인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삶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다. 타자를 통해 나를 인식하고 다시 그 타자를 사랑함으로써 변수에 대응할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택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에블린이 또 다른 조부 투바키가 되지 않은 이유는 베이글 대신 눈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베이글만큼 일상적이었던 눈알 스티커를 권태롭게 바라보는 동시에 사랑할 줄 알았던 에블린은 자신의 나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점들은 언제나 있어요. 손가락이 소시지인 황당한 우주에서도 발을 능숙하게 잘 쓰게 돼요.”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는 ‘오히려 좋아.’라는 문장이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비교와 경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유쾌한 생존방식일 것이다. 우리는 갖지 못한 것을 동경하며 떠나 보낸 선택지가 더 나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모든 선택은 명암이 있고 우리는 그 결과와 잘 살아간다. 길을 잃어 발견한 커피숍의 기쁨을 아는 것, 그것이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 에블린의 마지막 선택은 이러하다. 삶의 안녕을 위해 주어진 나약함과 사랑스러움을 전부 인정하는 것. 나약함은 전부 불가능할 것이라는 불안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면 사랑은 충만한 환각으로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를 만든다. 영화는 선택의 숙고를 유도하는 나약함과 그 결과와 동행하도록 하는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말한다. 하지 않을 법한 행동으로 무작위의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내가 할 법한 단 하나의 선택으로 이 세계의 내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결국,고유한 삶의 가치는 선택과 결과 사이의 연속적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



  수많은 우주 속 하찮은 먼지가 되느냐, 유일한 별빛이 되느냐는 나에게 달렸다. (하찮은 별빛이나 유일한 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 일상을 예찬하는 마음으로 나약함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을 사랑하는 것,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단을 시작할 줄 아는 것, 영화는 그것이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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