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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Oct 28. 2023

낮의 공원

서로 다른 두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중앙에 나무 여러 그루가 일렬로 놓인 길쭉한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 가장자리에는 희멀건 새똥이 묻은 허름한 나무 벤치 몇 개가 있다. 왜인지 벤치와 잘 어울리는 가을의 한낮에 나는 우연히 그 길쭉한 길을 걷게 되었다.


딱히 할 일이 있지 않아서 쉬어갈 겸 벤치에 앉았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났다. 어떤 사람은 묵묵했고 어떤 사람은 소란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도 들었고 세상의 여러 존재를 포함하는 두 사람의 대화도 들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조금도 나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뿐이다. 벤치에 앉아있는 한 사람과 그 앞을 지나는 한 사람의 마음은 겹칠 수 없었다. 같은 곳을 공유한다고 사람과 사람이 더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가을은 한층 더 쓸쓸해졌다.


이 벤치에 앉기 전에 들렀던 곳이 있다.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도심의 공원이었다. 길은 지나는 곳이라면, 공원은 머무르는 곳이었다. 휴식할 벤치는 그곳에도 있었지만 굳이 아파트 단지 사이의 허름한 벤치를 택한 이유는 특별하지 못하다. 모두가 머무르는 곳에서 함께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의 공원은 지나치게 아름답고 건전했다. 마치 새로운 나라에 온 것 같았다. 그 나라에 사는 국민들도 역시 아름다웠다. 그 속에서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나는 울창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도록 영글지 못했다. 가을은 그렇게 무섭게 찾아왔다. 당신은 서서히 한 해의 마지막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이 추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라고, 가을은 그렇게 무섭게 찾아왔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 애매한 시간이 되었다. 가을은 내게 다그치듯 체념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한가을에 찾은 낮의 공원은 나를 나무랐던 가을이 구석구석 내려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만 모르는 편애가 있었던 것처럼 그 안의 사람들은 너무도 싱그러웠던 것이다.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떨어져 허벅지를 찔렀다. 푸석한 낙엽은 떨어져도 아프지 않은데 나뭇가지는 닿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하얀 내복 상의에 강렬한 분홍빛 바지를 입은 여자아이가 날 빤히 보면서 앞을 지나갔다. 기껏해야 7살을 넘지 않을 것 같은 아이였다. 왜인지 혼이 난 기분이었다. 여기서 멀뚱히 뭐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앉아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겠지. 원래 아이들은 그렇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사색에 잠겨서 멈춰있는 어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미끄럼틀을 앞에 두고 놀이터 가장자리 벤치에 앉아있는 어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무서우면 시간에 맡겨버리는 마음도 있다고.


낮의 공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든 필요하면 찾아올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필요할 때만 찾는대도 상관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당연하니까. 휴식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가 머무르기 편한 아파트 단지 옆 공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나치게 건전해서 따분할지라도 그만큼 더 아름다워서 흐뭇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울창한 사람은 되고 싶었다. 밟으면 뽀득거리는 연초록 풀잎 정도만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을은 슬쩍 찾아왔고, 끝내 공원이 되지 못한 나는 공원이 무서워지는 사람이 되었다. 나와 일말의 관계도 없는 바깥의 아름다움이 너무 아름다우면 마음의 안에서 서서히 분명해지는 아픔이 있는 것 같다. 그 아름다움이 아무리 애써도 내가 알 수 없을, 결코 풍성하게 내 것이 되어 만끽할 수 없는 환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언젠가 내 것이었던 적 있는 것 같은 은은한 동질감에 너무 기뻐서, 근데 남은 것은 그리움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 생각이 너무 두렵고 아파서 눈물이 나기도 하는 것 같다.


가을이 내려앉은 낮의 공원은 너무 아름다웠다.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지나가는 길목 같았다. 분홍빛 바지를 입은 아이의 천진한 궁금증 같았다. 정답만 있는 세상 같았다. 투명한데도 반짝이는 유리 나라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서서히 분명해지는 아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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