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초록 Mar 02. 2024

종이접기

더 이상 안 되겠어요.

저 오늘부로 OOO에 대한 마음 접습니다.

그다음 끝선에 맞추어 반 접습니다.

뒤로 돌려 양쪽 모두 펼칩니다.

끝부분을 살짝 접고 중심선에 맞춰 위로 올려 접은 뒤,

뒤집으면 예쁜 하트 접기 완성


라는 댓글을 요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마음을 접는다고 표현하는데, 알고 보면 마치 종이 접듯 자신의 마음을 접어 하트 모양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재밌는 댓글이다.


마음을 종이 접듯 접는 다라...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마음은 어떤 형태가 있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표현은 일종의 언어유희나 방만한 시적 허용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생각을 이쯤에서 끝내는 것은 영 아쉽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깊게 생각해 보는 일이다. 터무니없어 보여서 자칫 넘어갈 수 있는 표현 하나를 놓치지 않아야 생각이 넓어지고, 그래야 내가 머무를 수 있는 터가 넓어지는 법이다. 어쨌든, 마음을 접는 일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보니까 살다 보면 마음 접을 일이 참 많다.


나는 무엇에 도전을 자처한 경험보다는, 무엇이 두려워 일찌감치 포기한 경험이 더 많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내가 잘할 수 없는 이유만 수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념 이후의 결과는 대개 후회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후회하는 것까지 나의 계획이었으니까. 두려움이 큰 사람들은 최악의 결과를 상정하고 차악을 택한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포기하는 것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도전했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창피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오늘을 내가 자처했는데, 자처한 삶에 한 번도 만족한 적 없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쥐 죽은 듯 살고 있는데 어딜 가나 나보다 나은 사람이 즐비했고, 그게 무서워서 쥐구멍으로 들어갔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한계와 환경이 어디에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또 포기하고 단념했다. 꿈이나 소망 같은 쉽고 달콤한 가치도 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 잡히는 것들만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구나. 누구나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는 것들도 한정되어 편재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내가 잘할 수 없는 이유만 수없이 떠올랐다.


글을 한 번 써봐야지 생각하다가 탁자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읽고는 나의 솜씨가 너무도 형편없게 느껴져서 쓰려던 마음을 접고. 일을 한 번 해봐야지 생각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경력을 쌓아온 사람을 만나고는 나의 재주가 너무도 형편없게 느껴져서 시작하려던 마음을 접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다가 나의 변변찮은 모습과 상대방의 태도에 마음을 접고. 오래도록 준비했던 시험도, 야심차게 마련한 계획도, 간절하게 최선을 다했던 면접도,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게 실패하고, 시간은 흘러 넘치고, 도전하기에 애매한 순간이 되었고, 그러면 다시 마음을 접고.


올해는 여행을 한 번 가봐야지, 맛있는 것을 한 번 먹어볼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던데 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하다가 빈약한 지갑과 밀려드는 걱정과 틈 없는 스케줄에 마음을 접고. 마음 접을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살다 보면 마음 접을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의지박약인 건지. 내가 끈기가 없는 건지. 내가 능력이 없는 건지. 그럼 이 모든 게 내 잘못인 건지. 정말 나의 선택으로 귀결된 삶이라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건지. 결국 내가 자처한 내 모습인지. 그래서 마음 꺾일 일이 찾아와도 긍정적으로 살아야 멋있는 모습인 건지. 중요한 것은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인 건지. 다리가 꺾이면 그냥 달릴 수 있나요?


어렸을 때, 나는 종이접기를 좋아했다. 그냥저냥 취미로 좋아한 것이 아니다. 매일 종이접기 유튜브를 찾아보면서 늦은 밤까지 색종이를 붙잡고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했다. 나의 종이접기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나의 쌍둥이 형이 나보다 훨씬 종이접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나는 허구한 날 별만 접고 있었는데 형은 드래곤을 접고, 펭귄을 접고, 움직이는 공을 접었다. 우리 집 책장에는 내가 접은 뭉툭하고 웃기게 생긴 별 몇 개와 형이 접은 뾰족하고 예쁜 별 하나가 나란히 놓였다. 아무리 유튜브를 천천히 돌려봐도 드래곤을 접는 일은 가닿을 수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별만 접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 어느 날은 교실에서 자습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색종이로 별을 접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선생님께도 드렸다. 별만 접었는데 친구들과 선생님이 나를 종이접기 마스터라고 불렀다. 별만 접었는데.


요즘 알게 된 건, 가끔은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마음을 접을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마음 접을 일이 참 많다. 우리는 쉽게 마음을 접어야 한다. 힘들면 얼른 마음을 접어야 한다. 지금 말하고 싶은 건 거두고 그만둔다는 의미의 '접음'이 아니다. 일정한 방식으로 꺾고 겹쳐 무엇을 만든다는 의미의 '접음'이다.


우리는 마음을 접어야 한다. 중요한 건, 반듯하게 접어야 한다. 마음에 안 든다고 구겨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해진 방법으로 차근차근 우리의 마음을 접어갈 때, 어느 순간 작품이 될 것이다. 지금도 마음을 접으며 살아가는 나 같은 겁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고픈 말이다. 잘 접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도약이라고. 드래곤을 접을 필요는 없다. 별만 접어도 된다. 하트를 접어도 좋겠다. 자, 오늘부로 우리의 마음을 접어보자. 그다음 끝선에 맞추어 반 접습니다. 뒤로 돌려 양쪽 모두 펼칩니다. 끝부분을 살짝 접고 중심선에 맞춰 위로 올려 접은 뒤, 뒤집으면 예쁜 하트 접기 완성.

작가의 이전글 방실방실 망실망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