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이 선물일까요?
부모는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래서 난 생각한다.
부모는 반드시 행복해야만 한다고.
세상이 행복해야만 그 세상에 사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고.
행복은 선택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필수적인 책임감이다.
어려서 엄마가 우는 걸 처음으로 본 날이 기억난다.
난 꽤나 큰 아이였다.
중학생정도 됐었던 것 같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아주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생명체인줄 몰랐다.
그런데 평생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엄마의 눈물이,
그 긴 시간을 한 번에 쏟아내기라도 하는 듯
멈출 줄을 모르고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눈물과 포효를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니 애초에 알지 못했다.
뭐, 이유는 많았겠지.
당시 엄마에게 행복이 될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말이다.
엄마의 눈물을 보기 전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걸.
그 눈물로 엄마의 불행을 확인받은 게 기점이 되어
난 늘 불안했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게 불안했다.
그 불안함은 성인이 될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엄마는 분명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견뎠다.
오로지 나와 오빠를 지켜내기 위해 견뎠다.
애석하게도 난 그걸 알고 있었다.
해서 내 불안함은 결국 죄책감이 됐다.
죄책감은 이정표가 되어
내 삶은 엄마 위주로 돌아갔다.
엄마가 내 행복을 위해 포기한
그 시간을 보상해 주기 위해 살았다.
그렇지만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닌 타인이 잡고 있는 삶은
나를 갉아먹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점차 잃었다.
뭔가가 딱히 힘들었던 건 아니다.
그저 내 삶의 이유가 없어 무력했다.
아무것도 내게 의미 있는 건 없었다.
숨 쉬는 것 초차도 내겐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멈춰 서서 생각을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생각했다.
파고파고 들어가다 보니 결국은
그 원망이 엄마를 향해 갔다.
엄마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안다.
엄마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보다도 날 더 사랑했기에
나의 행복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 크나큰 사랑이 잘못이었겠지.
난 그 잘못을 "무지"라고 부르기로 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자신을 깨트리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나를 지켜내고 키워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엄마가 깨트린 자신의 파편은
자식인 내 마음에 와서 박혔고
상처는 불안함이 되고 죄책감이 되고
결국은 아물지 못해 행복을 모르는 아이를 만들어냈다.
불행은 대물림이 됐다.
그리고 지금,
나도
누구보다 내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한 엄마가 됐다.
나의 희생 가득했던 엄마 덕에 배웠고
난 끊임없이 노력한다.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내 행복을 지키려 노력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는 행복이 무엇인지 배울 곳이 없다.
내가 희생하면
아이에게 내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보상심리는
아이에게 죄책감과 부담이 되어
길을 잃게 만드는 잘못된 표지판
혹은 주저앉게 만드는 어깨의 짐이 되겠지.
해서 나는 날 희생해서까지
아이를 '완벽하게' 키워내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불행할 만큼 희생까지 빚 내와서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
아이에게만 시선을 두는 게 아니라
내가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 놓치지 않고 관찰하다가
내 행복버튼을 충분히 눌러댄다.
누군가는 불량 엄마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럼 나는 말하고 싶다.
"다들 함께 불량 엄마가 되세요!"라고.
내가 행복할 줄 알아야 행복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고
내가 행복할 줄 알아야 내 행복을 아이에게 맡기지 않을 수 있다.
부모가 울면
아이의 세상은 무너진다.
부모가 웃으면
아이의 세상은 환해진다.
언제나 맑음일 수 없지만
적어도 사계절을 골고루,
이왕이면 해가 쨍한 날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