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해 Jan 07. 2024

피를 돈 주고 산다고?

식민지 조선, 수혈을 시작하다

한국의 수혈은 식민지 시기에 시작됐고, 그와 함께 매혈이 도입되었다.


가끔 그런 뉴스가 보이죠. 혈액 비축량이 부족하다. 모두 헌혈에 동참해 달라. 헌혈로 비축된 혈액은 수많은 의료 현장에 투입됩니다. 환자의 목숨을 살리는 데 필수적이죠.


팔에 주삿바늘을 꼽고 피를 뽑는 행위를 정확히는 채혈採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사람의 몸에서 뽑아낸 피를 환자의 혈관에 투여하는 걸 수혈輸血이라고 하죠.


수혈이 ‘과학적’인 치료법으로 발전한 건 20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합니다. 1901년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가 혈액형 분류법을 도입하고, 1915년 루이션(Richard Lewisohn)이 구연산나트륨에 혈액응고 방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죠.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언제부터 수혈이 시작됐을까요? 현재 혈액관리본부를 운영하는 대한적십자사에서 발간한, 혈액사업의 역사를 담은 책자를 보면 한국의 혈액사업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1950년대 초에 이르러서 수혈이 시작됐다는 거죠. 지금까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기를 든 연구자가 한 분 있습니다. 바로 김민지(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인데요. 아니다, 내가 연구해 보니 수혈은 이미 일제시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피를 파는 매혈賣血이 권장되기도 했다는데요.


2023년 11월, 학술지 《역사문제연구》 52호에 실린 김민지의 논문 〈식민지 조선의 매혈과 헌혈〉을 따라 함께 살펴봅시다.



유럽의 수혈 기술이 어떻게 한반도까지 온 거야?  


김민지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1931년 간행된 《일본외과학회잡지(日本外科學會雜誌)》 32권 4호에 게재된 글인데요. 저자는 기리하라 신이치(桐原眞一, 1889~1949). 경성의학전문학교와 조선총독부의원 외과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의사였습니다.


우리나라[일본]에서 수혈의 역사는 매우 최근의 일로,

1889~1890년(명치明治22~23년) 수혈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합리적인 수혈이 이루어진 것은 1919년(대정大正8년) 규슈대학 고토(後藤) 교수가 농흉膿胸 환자에게,

같은 해 도쿄대 시오다(鹽田) 교수가 자궁근종 환자에게 응용한 것이 최초이다.

또 나고야에서 사이토(齋藤) 교수가 1919년 말 외상환자에게 최초로 행하기도 했다.

     

19세기말, 수혈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걸 과학적이라고 볼 순 없었습니다. 대신 유럽 과학의 도입으로 ‘합리적’ 수혈이라고 할만한 게 시행된 것은 1919년이었죠. 몇몇 대학 교수들에 의해서요. 


우리나라 수혈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작년 하마구치(濱口) 수상이 재난을 당했을 때 시오다 교수가 수혈을 감행하여 매우 좋은 효과를 얻은 일이다.

이 사건 이후 수혈요법은 갑작스레 전국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하마구치 수상은 경제대공황 시기 일본제국 내각 총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한 청년이 총을 쏴 죽을 뻔한 적이 있었죠. 그때 수술 과정에서 수혈을 진행해 목숨을 건졌고, 이를 계기로 수혈요법이 널리 알려졌단 걸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백인제의 제자 강기려의 회고입니다. 백인제는 저 유명한 병원 브랜드, 백병원의 설립자입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조선총독부의원 외과 근무,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1941년 백인제 외과의원 개업,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임교수까지 역임한 인물이죠. 


백인제는 앞서 언급한 기리하라의 제자였습니다. 둘은 함께 1922년, 《조선의학회잡지(朝鮮醫學會雜誌)》에 〈일선日鮮 인간에 있어서 혈액속屬별別 백분율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特有性의 유전에 대해〉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혈액을 조사해 누가 더 뛰어난지 인종적 위계를 밝힌 연구였죠.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말이 되느냐 싶지만, 당시 학계는 선풍적인 업적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장기려는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런 연구업적과 관련하여 기리하라, 백 선생이 있는 경성의전외과[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는 그때 수혈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으로 알려지게 되다시피” 되었다고요.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유럽의 수혈 기술이 먼저 일본에 유입되었고, 기리하라 신이치 같은 일본인 의사에 의해 식민지 조선으로 유입된 거죠. 장기려가 1922년 논문이 발표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가 '수혈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으로 소문났다고 한 걸 보면 그 시점은 1920년대로 보입니다. 김민지는 식민지 조선에 수혈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 기리하라 신이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죠. 



조선인 반응은 어땠는데?


조선에는 옛부터 내려오는, 피와 관련한 전통이 하나 있죠. 바로 단지(斷指)입니다. 단지란 죽어가는 부모나 남편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 행위를 뜻합니다. 보통 왼쪽 넷째 손가락을 자르고, 흐르는 피를 아픈 이의 입에 넣거나, 아예 자른 손가락을 약에 섞여 먹인다고 하죠. 


조선 초부터 이러한 행위에 대해 포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효행의 전통으로 굳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이 합병된 후에도 포상이 계속됐단 겁니다. 바로 일제 조선총독부에 의해서요. 


1910년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앞으로 어떻게 통치할지 적은 강령을 발표합니다. 여기엔 "효자와 절부 등 향당에 모범이 되는 자에게 포상을 내려 그 덕행을 표창하도록 한다"는 구절도 포함됐죠. 


조선은 망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이 손가락을 잘라서 낸 피가 부모나 남편의 병을 낫게 하리라 믿었습니다.  천명이 감동하면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했죠. 


1920년대 수혈이 식민지 조선에 도입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단지와 수혈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혈의 과정을 어디서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피로 사람을 살린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백인제를 비롯한 많은 의사들이 신문기사와 대중강연을 통해 둘의 차이를 설명하려 노력할 정도였어요.


그럼에도 수백 년 전통을 가진 단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혈과 단지, 두 개념이 융합하는 모습도 더러 보였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직접 넣는 걸 유혈(流血) 또는 주혈(注血)이라고 불렀는데, 1930년대 이후엔 이걸 '단지수혈(斷指輸血)'이라 부릅니다. 혈액과 혈관에 주입하는 수혈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939년 5월 6일 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입니다. 


진주읍 봉산정 981번지에 사는 박종호(22)군은 수년 동안 병으로 인해 고생하는 자기의 어머니를 위하여 백방으로 효성을 다하여 오던 바

하는 수 없이 드디어 당지 배돈병원(培敦病院)에 진참 한즉 혈분이 부족하므로 먼저 보혈한 후에 해부하여 치료하면 전치할 수 있다는 고로

전기 종호는 곧 자기 피를 세 홉 반이나 제공하여 치료를 받은 결과 지성이 감천인지 회상하기 어려운 병을 다행히도 지금은 완치되었다 한다.

동민은 그의 효성에 크게 감격되어 동민회를 열고 찬의의 표를 행하였다 한다.  


세홉 반이면 대략 630ml 정도인데요. 오늘날 전혈기준 1회 헌혈 최대치가 400ml 니 꽤 초과된 수치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수혈이 곧 단지로 효를 행한 것 마냥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박종호군의 효심에 감격한 동민이 모여 회의를 열고 찬의를 표할 정도죠. 흥미롭습니다. 



근데 피를 돈 주고 샀다고? 


이처럼 조선인에게 피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채혈을 꺼렸습니다. 몸에서 피를 빼는 게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권영옹(權寧禺)이란 의사는 1936년 1월 1일 자《중앙(中央)》이란 잡지에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우리 의사 된 사람이 수혈을 하려고 할 때에 제일로 곤란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급혈자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피를 한 방울이라도 빼면 당장에 무슨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절대로 거절하는 일이 한 번 두 번이 아닙니다. 


환자를 살리려면 수혈이 꼭 필요한데, 피를 공급해 주는 급혈자는 없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죠. 지금처럼 혈액공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상상도 못 할 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벌어집니다. 자기 손자가 성홍열에 걸려 피가 필요한데 구하지 못하자, 인근 다방에서 일하는 소년을 다짜고짜 데려가 수혈을 시킨, 말도 안 되는 사건이 1935년 3월 27일 자 《조선일보》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죠. 기사 말미에 소년의 부모가 고소까지 준비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됐는진 모르겠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피를 돈 주고 사는 매혈이었죠. 매혈이 처음 시작된 시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김민지는 매혈이 제도화되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해 냅니다. 


1927년 6월 8일 《동아일보》엔 총독부의원에서 돈을 주고 혈액을 사기로 했다는 소식이 실립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소사(小使)들, 그러니까 잔심부름을 하는 이들이 생활난에 지쳐 자신들의 혈액을 사달라고 간청했다는 겁니다. 


병원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수혈을 위한 혈액 공급이 매우 부족한 게 눈에 띄었고, 아예 부족한 혈액을 자신들로부터 돈 주고 사라는 얘기였죠. 총독부의원은 이걸 받아들입니다. 피 200g에 10원씩이란 가격도 설정했습니다. 


비판 여론이 일자, 백인제는 매혈은 꼭 필요한 것이라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1927년 6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나오죠. 


수혈이 현대의학상에 가장 필요함은 누구나 다 증명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피를 넣어야만 될 환자에게는 '그 친척이나 친구 중에서 건강한 사람으로 혈분이 부합한 사람의 피를 이백그람 이내를 빼어 넣기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다든지,

있다 하더라도 피가 맞지 않는 때는 할 수 없이 남의 피를 구하여 넣어야 되겠으므로 그런 이에게는 약소하나마 적은 뜻을 표하기로 된 것이오. 

결코 돈 많은 사람이 돈으로 남의 피를 산다는 금전으로써 하는 매매는 아니외다. 


수혈이 필요한 사람은 친척, 친구의 도움을 받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예 친척마저도 없는 사람이라면? 


통신, 교통이 오늘만큼 발달하지 않은 시절, 연고도 없는 먼 타지에서 일하다가 다쳐 급히 수혈이 필요한 상태에 놓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매혈밖에 없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돈으로 남의 피를 산다는" 윤리 문제를 의식하면서도 매혈을 옹호할 수밖에 없던 이유죠. 


혈액의 매매와 같은 말은 분명 인도에 반하는 것처럼 불온당하게 들리지만,

만약 급혈자 자신에게 어떠한 고통도 주지 않고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직업급혈자를 이용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법률가에게도 이에 대한 의견을 구해보았으나, 급혈자 자신에게 게영향을 주지 않고 본인이 승낙한 경우라면 지장이 없다고 해석했다. 


기리하라는 같은 맥락에서 직업적으로 피를 판매하는 행위도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살펴본《일본외과학회잡지(日本外科學會雜誌)》 32권 4호에 게재된 글에 나오는 내용이죠. 


이건 선 넘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만 된다면 혈액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테고, 필요한 환자에게 제때제때 수혈을 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힘이 실린 결과, 193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산하에 경성급혈자협회(京城給血者協會)가 설립됩니다. 매혈을 강력히 주장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 근무하는 백인제 같은 의사들이 임원을 맡았죠. 


경성급혈자협회는 김민지는 경성급혈자협회가 1930년대 초 일본 나고야, 도쿄에서 등장한 수혈조합을 참고했다고 봅니다. 이곳과 비슷한 방식으로, 의사가 책임지고 급혈자를 검사·등록·관리했습니다. 


한 달에 1회 300~500g을 채혈하고, 100g에 10원가량을 주었다고 합니다. 돈 주고 사는 이미지를 만들지 않으려 사례 형식을 취했다고 하죠. 


제가 찾아본 바로는 한국에서 매혈이 법적으로 금지된 때는 1999년이라고 합니다. 혈액관리법에 혈액 매매 금지 조항이 생기면 서부터죠.


종전에는 혈액공급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가를 받고 혈액을 제공하는 매혈을 인정하여 왔으나,

이제는 헌혈로도 필요한 혈액을 공급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혈액의 매매행위 등을 금지하도록 함


당시 제시된 개정 이유입니다. 헌혈이 익숙한 요즘 세대로서는 이게 뭔가 싶겠지만, 매혈은 한국의 의료발달에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임이 분명해 보이네요. 



한반도에서 수혈이 시작된 과정. 참 흥미롭지 않나요? 이걸 포착해 내신 김민지 선생님도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루진 않았지만, 논문에서는 1937~1945년 일제의 총력전 체제 속에서 '헌혈'이란 개념이 어떻게 정립됐는지도 설명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김민지 선생님의 논문을 꼭 찾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상으로 논문 〈식민지 조선의 매혈과 헌혈〉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귀중한 연구 해주신 김민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역사학계에선 매년 수천 편의 논문이 생산됩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귀중한 연구지만, 읽히는 일은 매우 드물죠. 어려우니까요.


논문들은 계속 새로운 얘길 하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논문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재밌고, 상식을 깨고, 의의가 깊은 근현대 관련 최신 논문을 찾아 쉽게 풀어쓰려고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동학교도들이 의회 만들기를 시도했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