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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쟈스민 Jun 05. 2023

재능 없는 일을 한다는 것

교수님 죄송합니다.

나는 교육계통의 일을 하고 있다. 영어교사로 20대를 마쳤고 30대를 시작했다. 현재는 특수교사로 32살을 살고 있다. 그 사이에 대학교 교직원도 1년 했다. 교사와 교직원 업무를 하며 느낀 것은 나는 정말로 틀에 박힌 일을 못한다는 것이다. 노력의 문제를 떠나서 그냥 재능이 없다. 행정은 심각할 정도로 못해서 1년도 거의 다 못 채우다시피 그만둬버렸고 교사는 그래도 나름의 창의력을 활용할 일이 많아서 안간힘을 써가며 해나갔다. 


확실히 나는 예술계통의 일이 맞았다. 음악이나 미술 쪽으로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각이 좋아서 옷을 잘 입는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가족들의 코디를 해주면 모두 만족했다. 공간을 꾸미는 것에도 꽤 소질이 있어서 답이 없던 우리 신혼집 낡은 관사도 갤러리처럼 꾸며놓았다. 그랬더니 집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매주 집들이 행사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 신혼집인 관사의 before사진


관사의 after사진 정말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것을 바꾸었다..

우습지만 사주를 보러 가도 무조건 예체능 계열로 진학해야 한다는 말만 주야장천 들었다. 고교 진학 시 큐레이터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예술은 가난한 것이라는 생각에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결국 하고 싶고 잘하는 일과 현실 사이에 절충안으로 영문학과를 진학했다. 그래도 문학이 예술이라 나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행복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임용고시처럼 계속 앉아서 몇 년 동안이나 공부만 하는 게 내겐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특히 답이 정해져 있는 교육학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영어교육은 오래 해온 것이므로 덜 힘들었지만 20대 후반에 진로를 특수교육으로 트는 바람에 정말 힘들어졌다.


특수교육을 하게 된 계기는 도구이자 수단인 언어를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자체가 목적이고 내용인 과목을 가르치고 싶었고 가장 궁극적이고 적나라게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교육이 특수교육이라는 생각에 특수교육을 하게 되었다. 


특수교육 석사를 하며 논문을 쓸 땐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가 싶었다. 특수아동은 만나본적도 없으면서 특수학급과 특수학교의 기능교육 실정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다니 내가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잘하기나 하면 괜찮은데 맨날 교수님께 전화해서 오늘까지 못 들고 가겠다는 둥 몸이 아프다는 둥 핑계를 대며 기한도 못 맞췄다. 또 피드백해 주신 내용을 적절하게 수정하지도 못해서 한 학기 미룰까 하는 충동에 몸을 비틀며 몸부림쳤다. 나도나지만 교수님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 같은 죄인이 교수님께 한 가장 큰 잘못은 박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교수님은 곧 퇴직하시지만 아직도 박사를 막 시작하려고 준비하는 나를 도와주고 계신다. 임상경험이 없어서 논문을 보는 눈도 없고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치료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논문도 쓸 거리가 없어하는 마당에 일단 임상을 하러 치료실이든 학교든 어디든 가라는 조언을 해주셨고 그 조언대로 영어교사를 그만두고 치료실로 갔지만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서 1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치료실을 1달밖에 버티지 못한, 임상경험도 없고 특수교육 공부를 한 지 3년밖에 안된 부족하고 재능 없는 제자를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아직도 돌봐주신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보다 죄송하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먼저 나와서 스승의 날에 전화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한참을 한숨만 쉬다가 결국 오전에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은 담담하게 전화를 받으셨고 난 멋없이 무뚝뚝하게 '교수님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잘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은 '그래.'라고 대답하셨고 나는 다음에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ABA수업도 듣고 임상할 수 있는 곳도 알아봤지만 특수교사나 치료사를 하고 있는 친구들만큼 10년 이상의 지식과 경험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한계였고 같은 내용을 배워도 두 세번은 더 물어봐야 이해하는 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컷 울고 나니 너무 우울해지고 이건 이제 그만두고 그냥 하던 영어교사로 돌아가거나 재능이 있는 미술 쪽으로 지금이라도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서류를 낸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다. 그렇게 면접을 보고 특수학급 담임교사가 되었다. 내가 가게 된 자리는 정말 힘든 곳이었다. 앞의 선생님이 벌써 3번이나 바뀌었다. 모두가 포기한 자리에 내가 버티고 있다. 난 재능도 경험도 없다. 그래서 더 노력해야 한다. 재능 없는 초짜 선생님이라도 함께해 주는 아이가 고맙기도 하고 매일 악몽을 꾸며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로 힘들기도 하다. 


재능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짜증 난다. 노력은 남들보다 배로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늦게 시작하면 아득한 터널을 엉금엉금 기어서 사력을 다해 가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간 도착한다는 마음으로 버틴다. 처마 끝에 달린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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