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10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과 여러 비리 혐의로 인해 탄핵 위기를 맞았던 리처드 닉슨이 자진해서 하야하자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포드는 공화당 소속으로 하원에서 무려 13선에 성공한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부통령에 지명되기 직전까지 공화당의 하원 원내대표를 지내고 있었는데, 닉슨 행정부 1기 시절부터 부통령의 자리를 지키던 스피로 애그뉴가 수많은 비리 혐의와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 압박에 못 이겨 1973년 10월에 사임하면서 동년 12월, 부통령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부통령이 되고 8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포드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야 했다.
#1. 유럽에서 냉전의 끝을 알리다
얼떨결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포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특히 유럽에서 다자안보의 첫 선을 보인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헬싱키 협정을 도출해낸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의 33개국과 미국, 캐나다가 조인한 이 협정은 유럽 국가들의 주권을 보장하고 영토 불가침과 내정 불간섭 등을 규정했으며 유럽의 안보를 위해 국가 간의 협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했다. 안보를 위한 협력의 개념은 유럽연합(EU)과 기타 유럽 내의 여러 공동체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협정에 소련 또한 참여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유럽에서 이념 간의 대립이 많이 옅어지게 되었다. 닉슨 행정부 시기부터 이어진 데탕트의 분위기가 포드 행정부 시기에도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 날개 잃은 포드 행정부
많은 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드 행정부는 튀르키예의 키프로스 침공과 베트남의 공산화, 그리고 닉슨 행정부 시기에 발생한 오일 쇼크와 이로 인한 불황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해 큰 비판을 받게 된다. 키프로스는 그리스계 혈통의 국민과 튀르크계 혈통의 국민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던 곳으로,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친그리스 군사정권을 수립하면서 튀르키예와 갈등을 빚었다. 튀르키예는 튀르크계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침공했다. 키프로스의 군사정부와 그리스는 키프로스군과 민병대만으로 튀르키예군을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전쟁의 초반에 키프로스군이 선전하며 전망이 맞아떨어지는 듯했으나, 튀르키예군이 열띤 공세에 전세는 금방 역전되었다.
국제사회는 튀르키예를 규탄하고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이 키프로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포드 행정부는 키프로스가 거의 무너진 다음에야 중재를 명목으로 전쟁에 개입했고, 키프로스의 멸망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키프로스는 평화의 대가로 분단이라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했다. 튀르키예는 키프로스의 북부에 친튀르키예 성향의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을 세웠다. 한편 전쟁의 나비효과로 키프로스에 무리하게 개입했던 그리스의 군사정권은 무너졌고 튀르키예에서 군부의 힘이 매우 강해졌다. (키프로스 전쟁으로부터 6년이 지난 1980년, 튀르키예의 군부는 케난 오브렌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를 통해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북베트남이 파리 평화협정을 위반하고 남베트남을 침공했을 때도 포드 행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 포드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공한 것을 강력히 규탄했고 남베트남에 미군을 파병하려 했다. 파병과 전쟁 예산의 편성을 승인받기 위해 직접 의회에 나서 연설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의회는 모두 거부했다. 닉슨 행정부 시기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다양한 법안과 부서가 마련된 덕분에 의회는 대통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거수기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회가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군사 행위를 벌이는 것은 정치적인 부담이 상당한 일이었다. 포드는 비군사적 지원이라도 제공할 수 있도록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의회가 끝내 거부했다.
포드와 의회가 서로 대립하게 된 데는 닉슨을 사면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닉슨은 포드의 사면 덕분에 자신에게 부과된 범죄 혐의와 관련한 모든 법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결정에는 외교,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국민의 시선이 닉슨에 대한 수사에 쏠려 있는 것은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닉슨을 사면해 장애물을 없애겠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도는 좋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닉슨을 사면한 포드는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 여론이 고스란히 선거에 반영되어 공화당이 하원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민주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면서 공화당의 대통령인 포드는 취임 초기부터 레임덕(Lame Duck)을 겪어야 했다.
#3. 정리하며
유럽에서 냉전의 종식을 알리고 닉슨의 사면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혼란스러운 사회를 다잡으려 했던 포드는 외교에서 보여준 잇다른 실책과 길어지는 불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공화당 내의 경쟁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에게 가까스로 이긴 포드는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지고 말았다. 이렇게 포드 행정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980년, 포드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로널드 레이건에게 러닝 메이트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아 실제로 협상을 펼치기도 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해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