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룸매거진 Aug 14. 2023

이방인의 도시: 돌고 돌아 브루클린

뉴욕 생활 9년차 디자이너가 소개하는 브루클린의 매력

뉴욕에서 생활한 지 어언 9년 차, 이 도시가 품은 특색 있는 구역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다 정착한 브루클린은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내가 몰랐던 뉴욕의 얼굴들을 발견하게 하는 곳이다.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감각을 넘어, 그저 한 개인일 뿐인 나와 마주하게 하는 브루클린이 가진 매력을 소개한다.


*해외 거주 이방인들의 일상 & 커리어스토리를 담는 월간 유료 투룸매거진 29호에 수록된 콘텐츠입니다. 


ESSAY

이방인의 도시

돌고돌아 브루클린

글/사진 손원진 


나의 뉴욕, 브루클린

많은 사람들이 뉴욕을 떠올릴 때 화려한 야경과 스카이라인, 센트럴파크를 거니는 여유로운 뉴요커들, 빌딩숲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사원들을 생각하고, 그 배경은 대체로 맨해튼이다. 가십걸, 섹스 앤 더 시티, 프렌즈 등 전설적인 미드들도 모두 맨해튼의 글래머러스함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뉴욕은 대체로 화려함, 그 자체로 그려진다. 2015년 1월부터 숨 막히게 치열하고 부담스럽도록 화려한 이 도시에 살며 그 어떤 매력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처음 내 마음을 열게 해 준 곳은 바로 맨해튼이 아닌 브루클린이었다.


힙스터동네, 예술가동네 등으로 인식되는 브루클린에는 맨해튼같은 화려함보다도 매력적인 날것의 마이너감성이 있다. 한껏 차려입고 멋을 낸 우아한 느낌보다는 무심하게 대충 걸쳐 입고 나왔는데 흐르는 종류의 멋이랄까. 특히 내가 뉴욕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바꾸게 된 동네 부시윅(Bushwick)은 더더욱 정제되지 않은 창의성이 있는 곳이었다. 부시윅에 처음으로 갔던 날, 뉴욕에서 맛있기로 손에 꼽히는 피자집 Roberta’s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식당의 분위기와 피자의 맛도 아마 많이 거들었을 것이다. 식사 후, 그래피티가 가득한 골목들을 거닐며 언젠가 이 동네에 꼭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꿈은 2년 후 이루어졌다.


뉴욕에 대한 인상을 바꿔준 Roberta's Pizza


부시윅에서의 일상은 와일드했다. 울타리도 없는 건물 옥상엔 맥주를 한 병씩 들고 모여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자주 보였고, 하루는 애완 공작새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낮이고 밤이고 옆건물에 사는 푸에르토리칸 아저씨는 라틴음악을 동네 떠나가라 틀어뒀고, 여름철 찌는 날씨엔 소화전을 분수처럼 틀어놓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차들은 세차를 했다. 부시윅에 살며 알게 된 커피숍은 여전히 나의 뉴욕생활 통틀어 가장 맛있는 곳이고, 이곳에서 살았던 고작 1년의 시간 동안 화려함 저편의 있는 또 다른 뉴욕의 얼굴을 봤다고 생각한다.  





브루클린 대변인

5년 후인 지금 내가 사는 동네는 브루클린 안에서도 파크슬로프(Park Slope)라는 지역인데, 앞서 말한 부시윅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동네이다. 가족단위의 백인들이 많이 사는 이곳엔 유럽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오래된 브라운스톤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있고 좁은 도로 위로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있는데 그 풍경이 너무 예뻐서 이 동네를 골랐다. 뉴욕이 치열한 이민자의 도시라는 걸 잊게 만들 정도로 여유롭고 행복한 분위기가 이질적일 정도다. 지도를 보면 이 지역엔 센트럴파크와 견줄 정도로 큰 프로스펙 파크(Prospect Park)라는 공원이 있는데, 매주 토요일에는 로컬 파머스마켓이 열리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일요일마다 맛집들이 모여 각자 천막을 치고 음식을 판매하는 스모가스버그(Smorgasburg)가 열린다. 딱 요맘때쯤 벚꽃놀이 하러 가기 좋은 수목원(Brooklyn Botanic Garden)도 있다. 센트럴파크의 매력이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자연이라면, 프로스펙파크의 매력은 진정한 로컬들의 여유라고 말하고 싶다. 


브루클린의 브라운스톤으로 만들어진 건물들


하지만 파크슬로프에서 맨해튼으로 통근하는 일은 조금 힘겹다. 사무실이 많은 미드타운까지 못해도 40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가 “오늘은 내가 브루클린으로 놀러 갈게! 그린포인트에서 만날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두 지역 다 브루클린에 있는 동네가 맞지만 우리 집에서 그린포인트까지 가려면 차로는 30분, 지하철을 타면 50분 정도 걸린다. 그냥 맨해튼에서 보는 게 낫다는 말이다.  


프로스펙 파크의 여름풍경



뉴욕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타지에 사는 한국인들은 지역 선점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한다고 생각한다. 맨해튼 내의 한인타운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자리한 32번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유동인구가 많은 Garment District, 기차역인 펜스테이션(Penn Station)과 가깝기 때문에 이런 최적의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을까. 상점과 식당이 밀집된 한인타운과는 별개로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아마도 퀸스일 것이다.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는 한 발짝 떨어져 있으면서도 7호선을 타면 30분 이내에 맨해튼 중심부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인스타그램을 위한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식당들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차린 찐 맛집들이 훨씬 많고, 맨해튼 한인타운보다 싸고 맛있는 한식을 먹을 수 있는 플러싱(Flushing; 퀸스의 한 지역)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친구들과 플러싱에 가서 맨해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어구이와 막창구이를 먹고 대기시간 따위는 없는 작은 노래방에서 노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H마트의 존재는 한국인의 타지생활 퀄리티를 드라마틱하게 올려준다. 맨해튼에는 3군데, 퀸스에는 무려 7군데가 있는 H마트가 브루클린에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주기적으로 한식을 수혈해줘야 하는 밥순이인 나에겐 아주 치명적인 감점거리인 셈이다. 그나마 일본 슈퍼마켓과 한국 식품을 조금 입고하는 작은 마트들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늘 냉장고에 넉넉한 양의 김치와 비비고 만두가 있어야 마음이 풍족한 난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맨해튼까지 가서 장을 본다.  


브루클린의 브라운스톤으로 만들어진 건물들



그럼에도 브루클린에 정착한 이유

퀸스는 한국인으로 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편했지만, 놀거리나 볼거리 면에서 봤을 때 맨해튼이나 브루클린에 비해 많이 심심한 지역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안정적인 소속감도 들었지만, ‘나의 뉴욕생활은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간 나도 모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늘 깔려있었다. 주기적으로 비자를 연장하고 여름마다 이사를 다니며 이곳의 일상을 조금씩 연명해 가는 이방인의 삶에서 온전히 숨겨지지 않는 불안도 한몫했다.


그에 반해 브루클린에는 한국인 거주자가 확연히 적다. 부시윅에는 라틴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지금 사는 곳에는 백인들과 유대인들이 대부분이다. 동네에 간혹 가다 보이는 한식당들마저도 비한국인을 타깃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과연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생각한 적도 많았다. 더욱더 이방인처럼 느껴질 환경인데도 왠지 둥둥 떠있던 나의 발이 땅에 닿는 기분이 든다. 퀸스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소속감이 느껴진다. 물론 이런 느낌이 드는 데에는 다른 변수도 있을 것이고, 단순히 내 정신승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원을 달리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보면 여기가 내 집이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과 나는 인종은 다르지만 이곳을 집이라고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시윅 빈티지가게에서 사고 싶은 게 없었던 공작새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로 넘쳐나는 뉴욕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국적이라는 개념이 흐려진다. 뉴욕 토박이도,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외국인도 자신의 국적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한 개인으로서 어울리며 사는 진정한 멜팅팟(melting pot)을 경험한다. 인종차별과 혐오범죄는 아직 존재하며 그 때문에 긴장되는 일상을 보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서로의 문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또 존중하는 분위기도 느껴진다. 브루클린에서 나는 뉴욕의 다른 곳에서보다 좀 더 이방인이 되는 기분도 들지만, 동시에 국적이 지워진 채 그저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프로스펙 파크에서 벚꽃 향을 맡는 허블

글쓴이 소개  손원진

2015년에 뉴욕으로 이사와 퀸스에서 2년, 맨해튼에서 2.5년, 브루클린에서 3.5년을 살았다. 뉴욕에서 그래픽디자인 공부 후 프리랜서로, 투룸매거진 디자이너 겸 운영진으로 일하고 있다.























해외에서 용기있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이들의 이야기를 모바일 매거진으로 만나보세요. 


투룸매거진 29호 전권 읽기 

투룸매거진 최신호 읽기 

투룸매거진 정기 구독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공간과 디저트에 정체성을 담는 뉴욕의 오너셰프 이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