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1874년 여름, 모네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독립전이 열린지 두어달 가량 지났을 무렵 프록코트 차림의 남성이 아르장퇴유로 왔다. 그는 얼마전 열린 독립전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이 고수했던 야외 사생이라는 방식을 체득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는 모네보다 9살 가량 나이가 많았고 심지어 프랑스의 예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남자의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올랭피아>, <풀밭 위의 점심> 등으로 악명 높던 에두와르 마네는 이렇게 모네를 만났다.
물론 마네와 모네는 서로 구면이었다. 1860년대 모네는 국가 중심의 예술 시스템에 불만을 가진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두 명의 반항아, 마네와 쿠르베를 찾아갔다. 이 중 마네와의 만남은 카페 게르부아에서 저녁마다 벌어졌던 예술에 대한 난상토론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그는 때때로 마네의 화실을 찾아가 이 문제적 화가의 작업 방식을 보고 그가 그린 작품을 감상 하기도 했다. 1860년대 마네의 존재는 반항적인 젊은 화가들에게 우상이자 스승과도 같았다. 이 시기 마네와 모네의 입지는 앙리 팡탱 라투르가 그린 <바티뇰 구의 화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 아르장퇴유에서 화업을 갈고 닦은 두 명의 인상주의자가 보인다. 한 명은 화면 중앙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르느와르이고 다른 한 명은 르느와르 옆에 다소 비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네다. 재밌는 것은 모네와 르느와르 그리고 키가 제일 큰 바지유는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에서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어떠한 상징적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화가를 상징하는 소품을 쥐고 있지도 않았다. 마네에 대한 일종의 헌사였던 이 작품 속에서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은 오직 마네 한 명뿐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당시 바티뇰에서 모임의 중심 인물인지 누구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마네가 모네와 함께하기 위해 1874년 아르장퇴유로 왔던 것은 인상주의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마네의 방문은 독립전 그룹의 중심 인물이 모네였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증거일뿐만 아니라 마네 자신으로서도 기존의 스페인 바로크 회화의 영향력으로 인해 어두웠던 그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실제 1870년대 초중반 마네의 그림은 놀라울 정도로 밝아지며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이전보다 보다 고채도의 색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아르장퇴유로 온 마네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것을 흡수하지는 않았다. 마네의 목적은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지 남의 스타일을 따라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아르장퇴유 도착 이전 그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제시했던 모호한 표현 방식들은 1870년대에도 사그라들지 않으며 심지어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은 1860년대 살롱에서 논란을 일으킨 여러 작품들이 그러하듯 마네 본인이 의도한 것이었기에 그가 아르장퇴유라는 지역을 선택한 것에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 뿐만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이유들이 같이 존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요컨대 그는 교외라는 지역이 가진 독특한 특성과 그곳에서 여가를 즐기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모네와 르느와르가 교외 지역의 풍경에 매료되었다면 마네는 교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혹은 이곳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뱃놀이>와 <아르장퇴유>는 교외라는 지역적 특성과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결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뱃놀이>에서 두 남녀는 마치 사진과 같이 잘려나간 배 안에 앉아있다. 남자는 이 시기 보트 경주를 즐기는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복장을 하고 있으며 여자 또한 동시기 여성들의 복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두 명의 인물은 그 정체가 딱히 누구라고 확정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다. 이는 인물 사이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어색함, 정적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두 인물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소통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두 인물은 서로 대비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남자는 관객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고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막 하고 있던 노젓기를 멈추었다. 이와 반대로 여자는 무심한듯 관객을 보고 있지 않지만 분명 화면 바깥의 어떤 것을 보느라 관객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듯 하다. 시선뿐만 아니라 자세에서도 두 인물의 대비가 드러난다. 남자는 관객을 의식해서인지 몸통을 앞으로 수그리고 있는 반면 여자는 몸을 쭉 빼고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대비는 마네가 두 인물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드러낼 때 자주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마네의 인물 표현은 관객이 두 인물을 특정할 수 없게 만들고 단지 소거법을 이용해 이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만 하게 한다. 최소한 이들은 가족은 아니다. 마네가 그린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하지만 가족들의 야유회 풍경이라 보기에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친구인 것도 아닌듯 하다. 교외에 휴가를 나온 친구들끼리 할만한 행동은 르느와르의 <만찬>에서 나오는 장면이지 이러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적어도 학자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당시 파리에서 횡행하던 매춘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는 마네가 전 생애에 걸쳐 매춘이라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아르장퇴유라는 지역이 부르주아들의 특정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설사 두 인물이 매춘 관계가 아니고 가족 혹은 친구라 하더라도 작품의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는다. 만약 이들이 지인 관계라면 친밀한 관계여야 할 인물들 조차도 도시인들이 가진 특유의 무관심한 태도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마네가 교외에서 포착한 시대의 모순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즉, 교외에 나온 사람들은 갑갑한 도시 생활을 잊고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 왔지만 여전히 도시인이며 그렇기에 도시인의 특성을 교외 지역의 자연 풍경 앞에서까지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아르장퇴유>에서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1875년 살롱전 출품을 위해 제작한 이 작품은 오늘날 수 많은 학자들이 해석의 층위를 올리며 더욱 풍부한 해석이 더해진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수 많은 해석 중에 무엇보다 그림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것은 인물들의 시선이다. 인물들은 <뱃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물론 양상은 <뱃놀이>와 정반대다. 이번에는 여성이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고 남자가 바깥의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이 작품은 <뱃놀이>와 전혀 차별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인물들간의 모호한 관계에 아르장퇴유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모호한 지위를 얹어 그림 자체를 모호함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어색하게 앉아있는 남여의 뒤편으로 왼편에는 공장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고 오른편에는 나무들이 늘어선 산책로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연, 소음, 반복적 삶으로 점철된 갑갑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레저 활동을 통한 자유를 만끽하기 하기 위해 온 장소는 그러한 도시를 탄생시킨 산업의 상징인 공장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도시민들이 그러하듯 공해, 소음, 반복적 노동에 둘러싸여 비인간적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도피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옥인 곳. 이것이 바로 교외 지역의 본질이었다. 마네는 관객들에게 이곳은 휴양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업중심지였다는 것을 무심하게, 마치 자연스러운 배경인양 보여준다. 교외 지역을 규정하는 이러한 특성은 그것을 묘사한 회화를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지점으로 안내한다. 마네는 바로 이 지점을 도시인들의 소통 부재와 결합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림은 여러가지 모순 지점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그물망을 형성하게 된것이다.
여기서 마네와 다른 인상주의자, 특히 모네와 르느와르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드러난다. 마네는 교외 지역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점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었고 그것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화폭에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이고 반체제적인 성격은 바로 이러한 모순의 게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모네와 르느와르의 선택은 달랐다. 그들은 아르장퇴유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 측면을 은폐하거나 과장하는 방법을 이용해 교외 지역의 모호한 성격을 감추려고 했다. 비록 마네가 인상주의 독립전에 영향을 받아 아르장퇴유에 왔지만 결코 그들과 함께 묶어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