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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n 19. 2023

근대 미술을 배울 때 다비드부터 배우는 이유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의미 만들기 과정

자크루이 다비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형리들>, 1789,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원문 : Stefan Germer and Hubertus Kohle, From the theatrical to the aesthetic hero: on the privatization of the idea of virtue in David's Brutus and Sabines, Art History, 1986.
(연극적 영웅에서 미학적 영웅으로 : 다비드의 브루투스와 사비니 속 미덕 관념의 사유화에 관하여) 



장 자크 루소는 『에밀』(1762)에서 공적 의무를 강조한 고대의 교육 방식이 18세기 프랑스에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경험과 본성을 강조하는 자연주의적 교육을 주장했다. 이때 자연으로 지칭되는 인간 본성의 강조는 교육 분야를 넘어 예술 작품의 제작과 수용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야기했다. 슈테판 거머(Stefan Germer)와 후베르투스 콜레(Hubertus Kohle)가 아트 히스토리에 기고한 <연극적 영웅에서 미학적 영웅으로 : 다비드의 브루투스와 사비니 속 미덕 관념의 사유화에 관하여 From the theatrical to the aesthetic hero: on the privatization of the idea of virtue in David's Brutus and Sabines>는 이런 변화를 역사화 분야의 형식적 변화와 연결 지어 살펴본다. 두 저자는 특히 다비드의 작품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형리들>과 <사비니 여인의 중재>를 살펴보며 이 작품이 18세기 중후반 회화 분야에서 도덕성을 표현하는 방식과 어떤 식으로 조응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회화가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연극적 특성을 버리고 고유한 형식적 언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다비드가 성취한 지점들을 살펴본다.

  

18세기 본성 개념의 강조는 역사화 장르의 위기를 불러왔다. 본디 역사화의 목표는 개인의 본성을 억제하고 공공의 의무 혹은 자신이 품었던 대의나 신념(국가, 종교, 정치적 신념, 시민적 의무 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공공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주제는 인간 본성과 조화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무엇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집단과 개인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점차 개인의 고뇌와 슬픔에 공감하고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역사화에서도 시민적 의무와 이에 수반되는 개인의 희생, 고뇌를 표현하는 경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대 프랑스 비평에서 그러한 측면을 강조한 회화 작품들은 비극 주제(sujet traguque) 혹은 검은 주제(sujet noir)라는 장르적 분류로 묶였는데 이러한 회화들은 프랑스 대중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역사화의 변화로 취급되고 있었다. 


  

장시몬 베르텔레미,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1785, 캔버스에 유채, 투르 미술관


장시몬 베르텔레미(Jean-Simon Berthelemy, 1743-1811)의 작품 <만리우스 토르콰투스>(1785)는 이 장르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다. 작품은 명령을 무시한 채 전장에 뛰어든 아들을 처형하는 로마 집정관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일화를 담고 있다. 로마의 역사에서 이 일화는 혈연적 유대나 실적(명령 없이 뛰어든 아들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에 상관없이 법의 원칙 하에 아들에게 중죄를 내린 집정관의 공명정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은 작품이 공개되었을 시점에는 불가해한 무엇으로 여겨졌다. 자신의 혈육을 처형한 조치는 야만인이 할 법한 잔혹행위로 이해되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적 측면, 즉 슬픔이나 비통함을 결여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이 일화를 보다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로마적 덕성이라 불리는 법의 원칙보다 그러한 원칙과 개인의 슬픔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었다.   

저자들이 심리화(psychologization)라고 부르는 회화적 기법은 이러한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 연단에 앉아 있는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아들의 처형을 명령한다. 만약 고전적인 역사화였다면 주인공은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없이 명령을 내리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법을 집행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을 부여잡고 비통해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렇듯 심리화는 인물이 마주한 대립적인 상황과 이로 인한 고뇌를 표정이나 신체 동작을 통해서 드러내는 장치다.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영웅에 대한 관념을 180도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인물 묘사 관행의 한 흐름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영웅은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로,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웅은 마치 희생자처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고통스럽게 분투하는 혹은 그러한 상황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티치아노, <페사로의 성모>, 1519-1526, 캔버스에 유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베르텔레미의 심리화 기법은 몇몇 비평가들에게 효과적인 인물 묘사 방법으로 평가되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작품이 과도한 감정의 분출로 그것이 응당 전달해야 할 도덕적 측면이 지나치게 가려져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형식과 내용의 부조화로 인해 한쪽 측면이 너무 강화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베르텔레미는 작품을 구상하며 티치아노의 작품 <페사로의 성모>(1519–1526)를 참고해 인물들을 배치했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피라미드 구조는 작품의 강조점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피라미드 구조는 꼭대기에 위치한 성모와 예수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베르텔레미의 작품에서 피라미드 구조는 인물들의 감정적 분출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은 특히 구성상 아래에 있는 인물들의 상대적으로 굳은 표정과 집정관의 대조 효과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작품은 그것의 구성상 특징으로 인해 집단과 개인의 긴장 관계보다는 개인의 감정적 슬픔이 보다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독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작품의 주인공인 집정관의 묘사 방식 또한 문제가 되었다. 작가는 이 인물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 신체 동작을 한 인물 속에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바디랭귀지로 드러내다 보니 동작과 표정이 과장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비평가들이 이 작품 속 주인공이 실제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연극 속 인물 같다는 비판을 가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등장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다비드는 이 시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연극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회화 고유의 형식적 언어를 이용해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브루투스>다. 작품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브루투스의 일화는 큰 틀에서 베르텔레미가 묘사한 일화와 유사한 주제 의식을 전달한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 초기 왕정복고를 시도한 자신의 아들들을 처형한 인물로 공화정을 위해 자신의 감정적 측면을 희생하고 대의에 따른 모범적 인물로 여겨졌다. 이 작품에서 나타난 심리적 딜레마는 베르텔레미의 작품 속 주인공이 겪었던 문제와 유사하지만 다비드는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묘사했다. 차이는 구성 변화에 있다. 우선 제일 두드러지는 지점은 피라미드 구조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피라미드 구조는 주인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화가 제시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었지만 주인공의 양가적 감정을 전달하기에는 부적합했다. 다비드의 고민은 주인공에게 작품의 모든 메시지를 떠맡길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작품의 주제가 반드시 주인공의 동작이나 표정 혹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맥락들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가? 다비드는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반드시 작품 속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던 것 같다. 오히려 회화 장르에서 주제는 회화 속 여러 요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둠에 잠겨 사색하는 브루투스의 모습은 그러한 의도를 충실히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해석대로라면 브루투스는 작품 내에서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부적절한 역사화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턱을 괴고 있는 브루투스는 회화 속의 묘사된 여러 부수적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공공의 안녕과 개인적 감정 사이에서 고뇌하는 존재로 그려질 수 있다. 로마 여신상의 존재와 형리들에 의해 실려오는 아들들의 시신 그리고 절규하는 좌측의 여인들은 그러한 해석을 돕는 장치들이다. 관객들은 어둠에 잠겨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브루투스의 심리 상태를 주변에 배치된 수많은 기물들과 인물들을 통해서 파악한다. 브루투스는 여인들의 존재와 실려오는 아들들의 시신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바로 뒤에 보이는 여신상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선택이 로마를 위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중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가적 감정이 브루투스의 표정과 동작이 아닌 브루투스와 화면 속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다비드가 찾은 해결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회화 작품이 읽히기보다는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가진 양가적인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반드시 주인공이 그러한 감정을 동작이나 표정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었다. 회화는 그러한 감정이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독해될 여지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어둠에 잠긴 브루투스의 표정과 동작을 정확하게 독해할 수 없음에도 주변 소품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그 심리상태를 유추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작품 속에 묘사한 많은 것들이 읽히기보다는 해석되지 위한 장치들임을 알 수 있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서 로마 여신상이 방 쪽이 아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러운 묘사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확히 다비드가 의도한 것이었다. 작품 속 로마 여신상은 화면 속 장소가 고대 로마라는 장소 고증을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닌 관객들에게 브루투스가 처한 양가적 상황을 보여주는 요소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비평가는 고대 로마의 형벌, 장례 문화를 지적하며 처형당한 아들의 시신이 브루투스의 집에 들어오는 것은 고증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희생한 브루투스의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뿐 고대 로마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비드는 <브루투스>를 통해서 작품의 주제 의식을 관객 스스로가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회화 작품이 반드시 모든 것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굳이 시각적으로 주제를 재현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해석을 통해 그것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화가가 할 일은 그러한 해석이 용이하도록 여러 가지 형식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적 수단을 공유함으로써 기존의 심리화라는 방법이 내포한 문제점을 회피할 수 있었다. 과잉이 아닌 생략의 전략을 통해 해석의 공을 관객들에게 넘겨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지 않도록 혹은 적어도 화면상으로 과장된 표현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조슈아 레이놀즈, <우골리노>, 1770-1773, 캔버스에 유채, 내셔널 트러스트


<브루투스>가 공개된 이후 비평가들은 이것이 기존의 프랑스 회화와는 다른 새로운 작품임을 이해했다. 그것이 부정적 반응이든 긍정적 반응이든 작품은 회화의 의미를 관객의 상상력과 해석에 맡겼다는 점에서 하나의 혁신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장치가 다비드가 단독으로 고안한 무엇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가령 레이놀즈의 작품 <우골리노>(1774)에서는 유사하게 대비를 통한 주제 의식의 전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회화 고유의 표현 방식을 통해서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화가들에게 중요한 해결 과제로 떠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비드에게 공로가 있다면 이러한 과제를 <브루투스>와 같은 작품을 통해 효과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비드의 해법이 역사화의 의미 전달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니었다. 미술 작품이 읽는 작품이 아니라 해석하는 작품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의 의미를 상당 부분 관객에게 맡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관객들의 해석은 분명 그 시대가 처한 정치, 사회적 조건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전국을 뒤덮은 프랑스에서 이것은 작품의 의미가 정치적 변동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역사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미덕과 도덕성 또한 해석의 준거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고초를 겪던 시기, 다비드는 자신의 창작 방법을 재고하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의 선택은 회화적 특성을 더욱 극단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사비니 여인의 중재>, 1799,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사비니 여인의 중재>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이 작품에 이르러 다비드는 회화 작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연극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회화만이 가진 매체적 특징인 동시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여기서 연극적 요소란 화면 속에서 행동들의 인과관계가 순차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령 베르텔레미의 작품에서 그러한 인과관계는 손을 뻗어 사형을 선고하는 집정관의 모습과 이를 받아들이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다비드의 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브루투스>에서 여인들의 절규는 형리들이 가져오는 아들의 시신과 인과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여전히 작품을 해석이 아닌 읽기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그는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행위들의 인과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순차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행위들이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나게 만들어 관객들이 이를 능동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요컨대 가운데 팔을 뻗고 있는 헤르실리아는 중재에 성공했을까? 로물루스가 잡고 있는 창은 던져질 것인가? 화면 좌우에 주인공과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병사들은 도망치는 것인가 아니면 헤르실리아의 호소를 듣고 전투를 포기한 것일까? 그는 그림 속 인물들의 행동이 하나의 인과적 내러티브처럼 독해될 소지를 최대한 줄여가면서 전투의 장면을 박제된 모습으로 제시했다. 장면 속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해석은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의 해석은 온전히 관객들의 상상에 달려 있다. <브루투스>에서 작품 읽기는 들어오는 아들의 시체와 이를 보고 절규하는 어머니라는 순서를 큰 줄기로 삼는다면 <사비니 여인의 중재>에서는 최소한의 사건의 흐름도 배제한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이 소거된 빈자리를 다비드는 철저한 고증으로 채웠다.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그대로 따온듯한 인물의 자세, 당대의 고고학 유물에서 나오는 그리스 소품들이 작품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활발하게 벌어진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고전고대에 대한 관심은 다비드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게 했다. 특히 그는 빙켈만이 주장했던 고대 예술 이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의 미술을 평하며 그것이 육체 표현을 통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절제된 동작을 통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감정과 의미를 촉발시킨다고 보았다. 요컨대 다비드의 작품은 빙켈만이 해석한 고대 예술을 18세기 역사화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작업이었다. 다비드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정확한 고증만이 사회적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보편적 예술을 만들 수 있는 길이라 보았던 것 같다. 이때 고증이라는 것은 사건을 실제 그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식으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화 고유의 형식적 언어를 활용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만약 회화가 문학, 연극의 방식을 쫓을 경우 해석은 내러티브의 함정에 굴러 떨어져 그것이 가진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회화 예술이 가진 가장 큰 강점, 즉 외양에 대한 강박적일 정도의 정확한 묘사는 연극과 문학 매체에서 할 수 없는 회화만의 고유한 의미 전달 기능이며 이것을 통해서만이 해석의 권한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요약을 마무리하며 나온 지 40년이 훌쩍 넘어가는 이 글이 왜 오늘날에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개인적 생각을 밝히는 것이 글의 의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논문은 근대 미술을 배움에 있어 꽤나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인 연극성의 문제를 탐구한다. 마이클 프리드가 이야기했듯이 18세기말 연극성과 몰입의 문제는 예술가들이 탐구했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대한 화가들의 다양한 답이 후일 추상이라는 자기반영성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더욱이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현대 예술을 설명하는 많은 글들이 인상주의를 이전 시기의 모든 논의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처럼 활용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80년대 나온 이 글이 제시하는 통찰은 여전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물론 이렇게 거대한 시기적 흐름뿐만 아니라 다비드의 작품 자체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이 글이 주는 메시지는 중요하다. 이 글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한 가지는 각 매체들의 고유한 특성들에 대한 18세기인들의 논의가 작품 제작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을 무시한 채 다비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왜 우리는 근대 미술을 배울 때 신고전주의와 다비드를 배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신고전주의가 단순히 고전 고대라는 옛 시기를 재발견하고 이를 구현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단순히 앞으로 나오게 될 여러 예술들의 안티테제에 불과한 사조일 것이다. 또한 다비드의 예술이 프랑스혁명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맞추어 이리저리 그 내용을 바꿔가며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 생명력은 1815년 워털루에서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말하듯 신고전주의가 고유의 형식적 언어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노력 속에서 탄생했다면 그것은 뒤이어 등장하게 될 낭만주의, 사실주의만큼이나 현대 예술 탄생에 결정적 공헌을 한 예술이 된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중심에 다비드의 예술이 있다는 것이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cf) 여기서 privatization에 대한 마땅한 번역어를 찾지못해 사유화라고 썼지만 내면화로 바꿔서 읽는 것이 글 이해에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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