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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Jul 11. 2023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역사적 기원

장밥티스트 마르탱,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의 회합>, 1712,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16세기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수공업의 일종이 아닌 창조적 창작 행위라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예술 작품은 장인들의 기능적 숙련도의 결과가 아닌 지적 활동의 산물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관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이탈리아 아카데미는 고대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이론적인 토론을 진행하는 등 보다 지적인 교육 기관으로의 역할을 자처했다. 피렌체에 설립된 아카데미아 델 아르테 델 디세뇨(Accademia del Arte del Disegno)나 로마에 생긴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Accademia di San Lucca)가 이 시기 대표적인 아카데미들이었다. 이탈리아 각지에 설립된 아카데미들은 프랑스에서 온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에서 공부했던 샤를 르 브룅도 그중 하나였다.   


1646년 샤를 르 브룅이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예술계의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프랑스 예술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예술 직인들과 상인의 조합인 생 뤽 조합(Guild of Saint Luke)이었다. 이들은 1391년 필리프 4세로부터 여러 특권을 받은 이후 오랫동안 프랑스 내 예술가들의 여러 활동들을 규제했다. 하지만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예술가가 운 좋게 왕가의 눈에 들어 왕으로부터 국왕인가서(Brévetaire)를 받으면 조합의 규칙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갈등의 불씨는 여기서 피어올랐다. 국왕인가서를 받은 왕실 화가들과 조합 예술가들은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이는 루이 13세 시기 이탈리아에서 영향을 받은 일군의 화가들이 왕실 화가로 일하게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샤를 르 브룅이 이탈리아 도착한 1646년 조합은 왕실 화가들의 수를 줄이고 그들의 특권을 축소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파리 의회에 제출했다. 이 사건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조합이 가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조합은 일찍이 1622년 루이 13세로부터 그동안 누려왔던 특권들을 왕에게 재확인받으며 그 위치를 공고히 했다. 그런데 프랑스 왕실이 왕실 화가의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특권을 우회하자 역으로 왕이 아닌 파리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 시기 파리가 반역 도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왕실에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조합의 선택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파리 의회는 이 요청에 화답했다. 1647년 8월 의회는 판결을 위해 왕실 화가 전원을 소환하고 어떠한 경유를 통해 왕실 화가로 임명되었는지 설명하라 요구했다. 왕실 화가들은 의회의 조치에 격분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조합의 영향력 바깥에 존재하는 예술가들은 자신을 지킬 새로운 기관, 아카데미를 설립할 결심을 굳혔다.


니콜라스 드 라르질리예, <샤를 르 브룅의 초상>, 1686, 루브르 박물관


1648년 1월 20일. 샤를 르 브룅을 필두로 한 일군의 왕실 예술가들은 왕에게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설립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청원서에 서명한 인원은 22명으로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영향을 받은 고전주의 미술의 옹호자들이었다. 왕실의 입장에서 청원서는 국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조합과 이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견제할 기회였다. 비록 아카데미 그 자체는 예술계 내부의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그 이면에는 정치적 논리가 존재했던 것이다. 2월 1일 기관의 설립 승인이 떨어졌을 때 샤를 르 브룅을 비롯한 청원서의 서명자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조합으로부터 분리된 예술가 집단의 확립이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아카데미 설립 취지와 동일하게 이론적인 기반을 갖춘 창조적인 행위를 강조했다.


초기 아카데미는 단지 교육 기관이었다. 아카데미는 학생들에게 원근법, 기하학, 해부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으며 정기적으로 강연을 열어 이론적 토론을 이어갔다. 특히 강연은 아카데미가 지향하는 이론적 틀을 규정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카데미 회원 혹은 외부 초청 인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강연은 모범으로 여겨지는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창작 규범을 제시하는 자리였다. 이때의 강연을 토대로 역사화의 우위와 통일적 구성을 통한 주제와 내러티브의 명료한 전달, 색채에 대한 선의 우위 같은 17세기 후반의 중요한 규범들이 탄생했다. 1667년에 들어서는 강연과 토론이 서기관에 의해 『법례집』으로 기록되어 나중에 참고할 표준적인 교육 방침으로 기능했다. 이것이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가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바뀐 19세기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시기 강연은 이후 프랑스 예술 이론에 초석을 놓은 셈이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절대적 규범의 산실로 거듭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17세기 아카데미는 조합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와 대결해야 했다. 아카데미 설립 승인이 떨어진 이후 4년 동안은 조합에 호의적이었던 파리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해 기관 등록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재정적인 문제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조합원들의 공동 출자와 입회비로 운영하던 조합과 달리 아카데미는 자체적인 수익 구조가 없었다. 시대적 상황 또한 아카데미에 불리했다. 프롱드의 난을 전후로 약해진 프랑스 왕권은 흔들리고 있었고 아카데미에 어떠한 지원도 할 수 없었다. 조합은 왕에게 아카데미의 각종 규제를 청원했고 귀족들 또한 아카데미와 왕실 세력을 연결시키며 그들을 기피했다. 역경 속에서 아카데미는 1649년 연간 10 리브르의 회원비를 받고 장소 선정과 모델료를 자가부담 하는 방식으로 지속성을 꾀했지만 불안한 입지는 여전했다.


곤궁했던 상황은 정치적 변화와 함께 전환점을 맞이한다. 어린 루이 14세를 대신해 국정을 돌보던 모후 안 도트리쉬의 섭정 체제가 끝나고 재상인 마자랭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프롱드의 난을 진압했다. 1661년 마자랭의 사망하고 뒤이어 루이 14세가 친정을 선포하면서 프랑스 왕권은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 아카데미 또한 나름의 내실을 다지며 천천히 체계를 갖춰나갔다. 오텔 클리송(Hôtel Clisson)에 터를 잡은 이후 1654년에는 아카데미의 교수들을 임용하고 1663년 12월 24일에는 86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아카데미 조직의 출범을 공표했다. 조직의 구성 또한 후견인(Protector), 부후견인(Vice-Protector), 학장(Director)을 시작으로 그 아래로 학부장(Rector)과 교수(Professor), 평의원(Councillor)과 아카데미 회원(académicien)으로 나누었다. 여기에 더해 학부장이나 교수가 각각 부학부장과 조교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집행부뿐만 아니라 회원의 등급 또한 세분했다. 본래 조직 운영의 결정 권한을 가지며 교수직을 역임했던 원로 혹은 선임 회원(ancien)과 일반 회원(académiste)으로 나뉘었던 회원 등급을 투표권을 가진 아카데미 회원과 아카데미 수업을 수강하는 회원으로 나누었으며 수업을 듣는 회원은 학생(éléve) 신분으로 시작하여 agréés, académiciens라는 단계를 거쳐 투표권을 가진 정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조직 구성과 그 변화

Sharon Lindahl Boedo, Reception and membership at the 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1648-1793, (Doctoral dissertation, Cornell University, 2005), p. 49. 에서 발췌



이렇듯 1660년대에 들어서 아카데미의 체계가 잡히게 된 것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시기 프랑스 재상이었던 콜베르는 아카데미 부후견인이 된 이후 조직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재정 문제였다. 전술한 바 있듯, 정치적 상황과 경쟁 기관의 견제로 큰 위기를 맞았던 아카데미는 궁여지책으로 회원들에게 활동에 필요한 대부분의 비용을 자가부담하게 하고 회원비를 거두며 운영비를 충당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즉각적으로 회원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왔으며 그렇기에 새로운 재정 확보 수단이 필요했다. 콜베르는 그 수단을 왕실의 지원에서 찾았다. 1663년의 강령(Article XXV)에서 아카데미는 왕실로부터 매년 400리브르를 받았다. 또한 그 해 국정회의에서 왕실에 소속된 화가와 조각가들이 의무적으로 아카데미에 가입하도록 의결했다. 이외에도 콜베르는 아카데미에 각종 특권을 부여해 국가를 대표하는 전문적인 예술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살아 있는 모델을 대상으로 한 드로잉 수업을 아카데미에서만 허가하거나 미술 이론과 비평가들을 초청하여 회원들에게 미술 이론을 가르치게 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또한 로마상을 신설하여 4년간 로마에 위치한 로마 아카데미에 국비 연수를 시킬 수 있는 권한을 아카데미에 부여했으며 이때 선발될 학생들의 심사 권한 또한 아카데미가 가지게 되었다. 기관의 위치도 루브르 궁 내로 옮기면서 왕실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1660년대 왕실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변화한 아카데미는 이제 수많은 예술 기관 중 하나가 아니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카데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 기관으로 자리 잡으며 프랑스혁명 시기 아카데미가 해소될 때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에는 부작용 또한 존재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푸생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를 중심으로 하는 고전주의 회화를 규범으로 삼고자 했다. 이들의 설립 목표는 예술의 내적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출발부터 그 목적은 정치적 격랑과 얽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1660년대 콜베르가 아카데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결과의 연장선이었다. 1664년 르 브룅이 왕실 수석 화가로 임명된 것은 아카데미의 정치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콜베르에게 있어 아카데미의 화가들은 왕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뒷받침하고 조합 출신 예술가들을 대신해 베르사유 궁 장식을 비롯한 각종 왕실 관련 예술 사업을 맡을 수 있는 대안이었다. 이러한 콜베르의 의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예술계 내에서 아카데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인 살롱전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1699년 살롱전


살롱에 대한 조항은 1663년의 조항에 처음 명시되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아카데미는 매년 7월 첫째 주 토요일에 아카데미에서 총회를 열고 그 기간 동안 회원들은 아카데미 부지를 장식할 작품을 가져와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콜베르의 요구는 회원들이 선보인 훌륭한 작품이 곧 그들을 지원하는 국왕의 위대함을 강조해 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런 요구는 회원들 입장에서 나쁠 것이 없었다. 예술계 내에서 아카데미 회원들이 제시하는 여러 이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항에 명시된 살롱전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우선 살롱전은 그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1663년의 조항이 만들어진 이후 다음 해 7월 제대로 된 작품을 제출할 회원이 부족해 9월 개최로 미뤄졌다. 이러한 일이 매해 지속되자 콜베르는 격년제로 개최 기간을 늘려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이렇게 시작된 살롱전은 17-18세기 동안 여러 변화를 겪었다. 1673년에는 예술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적은 소책자가 발간되기 시작했고 1699년에는 전시 장소가 루브르 대회당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이후 아카데미 설립의 중심인물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자 살롱은 아카데미의 약화와 함께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살롱전의 부활을 알린 건 1725년 살롱 카레(Salon carré)에서의 전시였다. 이 전시는 기간도 짧았고 규모도 작았지만 오늘날 살롱전이라 부르는 전시명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8세기초 비정기적으로 열린 살롱이 안정화된 것은 1751년에 들어서였다. 1751년의 전시는 비록 규모면에서는 크지 않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홀수해마다 왕의 축제일(8월 25일)에 정기적으로 살롱을 개최함으로써 그 권위를 회복해 혁명 전까지 유지되었다.


아카데미는 프랑스 근대 미술을 배울 때 보수적 권위를 상징하는 단체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시작에 있어 아카데미는 아주 미약한 집단이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소수의 예술가들에 의해 결성된 조직이었다. 17세기 공고한 지위를 누리던 조합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던 왕실 화가들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제도를 기반으로 푸생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라는 예술적 목표를 지향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목표는 왕과 귀족의 대립이라는 프랑스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맞물렸다. 콜베르가 주도한 아카데미의 일련의 변화는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조직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이제 아카데미는 프랑스 예술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다.




※ 참고문헌

Hannah Williams, Académie Royale: A History in Portraits, 2017.

Gerald W. Blaney, Nicolas Poussin, Charles Le Brun and the Royal Academy of Painting and Sculpture, Paris, 1648 : a kinship of aesthetics, (Masters of thesis, McGill University, 1999)

Nicholas Mirzoeff, Pictorial sign and social order : L'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Sculpture 1638-1752, (PhD thesis, University of Warwick, 1990)

Sharon Lindahl Boedo, Reception and membership at the 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1648-1793, (Doctoral dissertation, Cornell University, 2005)

김선형, 프랑스 살롱전시회의 기원과 역사(1667-1799) - 아카데미에서 살롱전시회로, 프랑스 문화 연구, Vol. 49, 2021.

김정락, 17세기 프랑스 왕립 미술아카데미의 강연: 근대 미술이념의 형성,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Vol. 33, 2010.

신상철, 프랑스 예술가들의 공간, 왕립 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의 형성과정과 샤를르 르 브룅의 회화 규범,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Vol. 44, 2016. 



19세기 초를 다루는 논문들로 넘어가기 전 기본적인 사항들을 전부 다 까먹어서(...) 복습한다는 의미에서 과거로 시간을 돌려봤습니다.

 이 연재를 처음부터 읽은 분이라면 중간에 1년 가까이 공백이 있다는 걸 눈치채셨을 텐데 일이 바빠 책을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책을 멀리하니 자연스레 학부 수준의 지식부터 천천히 까먹게 되더군요. 공부라는 것이 근육을 기르는 것과 같아서 조금만 쉬어도 티가 난다는 모 선배의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다음 편에서는 19세기 살롱전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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