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붕괴 혹은 다양성의 개화
원문 : Susan Siegfried, Alternative Narratives, Art History, vol.36, 2013.
(대안적 내러티브들)
19세기 초 프랑스 미술계에서 보수적 경향을 대표하는 화가, 평론가들이 가장 자주 쓴 단어는 아마도 과잉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이때 과잉은 평자마다 다른 맥락으로 호출되었다. 누군가에게 과잉은 작품 수의 과잉이었다. 또 누군가에겐 작품 속 표현 방식의 과잉이었다. 과잉을 예술 향유층과 예술가의 증가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과잉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과잉은 19세기 초 통제력을 잃은 예술을 수식하는 단골 용어였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그들의 문제의식은 동일했지만 현상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은 차이가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지적은 제도적 측면에서 촉발되었다. 몇몇 비평가들은 예술의 질적 저하가 권위 있는 기관의 부재 때문으로 보았다. 그들의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했다. 혁명이 아카데미를 학술원 체제로 바꾼 뒤 미술은 동시대 진보적 인사들도 인정했듯 엄청난 질적 저하를 겪었으며 그것은 나폴레옹이 국가 후원으로 예술을 프로파간다로 활용한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회화 분야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던 역사화는 지리멸렬함을 면치 못했다. 1816년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다시 부활해 살롱 전시 운영에 관한 여러 권리들을 부여받음으로써 다시 본래의 엄격한 살롱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8세기말의 프랑스와 19세기 초의 프랑스는 사회적, 문화적 양상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보수적 비평가들은 정치가 구체제로 복귀했듯이 문화 또한 구체제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가 말해주 듯 정치와 문화 모두에게 있어 환상에 불과했다.
한편 일부 비평가들은 보다 더 큰 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들은 작품의 수준 저하가 왕, 귀족의 후원 하에 제작된 작품과 부르주아의 취향에 맞춘 작품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첫 번째 주장과 마찬가지로 구체제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술 시장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있어 부르주아 취향은 곧 살롱전 바깥에서 작동되고 있는 미술 시장의 취향과 동의어였다. 풍경화와 풍속화 같은 장르화의 유행과 판화의 보급은 그 징후였다. 예술은 소수만이 누려야만 했다. 만약 그것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한낱 상품에 불과했다. 그들은 예술이 예술로 남기 위한 여러 방편들을 고민했다. 그러나 자본은 그들이 난공불락이라 생각했던 예술의 여러 분야에 틈입했고 거기에 단단히 뿌리를 박았다. 상품화라는 파도를 막는 살롱은 19세기 후반 국가라는 방파제가 떠나자 무너지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아트 딜러들이었다.
끝으로 어떤 평론가들은 예술의 장르적 규범 자체가 큰 위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했다. 역사화의 위기는 그 징후였다. 실력 있는 화가들이 자신의 야망을 뽐낼 수 있는 기회였던 역사화 제작은 이제 규칙에 얽매인 답답한 회화가 되었을 뿐이다. 지난 세기 역사화의 전범을 규정했던 여러 법칙들은 이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보수적 비평가들에게 있어 역사화에 대한 공격은 곧 미술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무너트리는 어리석은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역사화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정해야 했다. 이에 부응해 화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화의 부활을 시도했다. 하지만 1850년대를 기점으로 그런 노력들이 대세를 바꿀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 역사화는 이제 풍경화라는 떠오르는 해에게 그 영광을 넘겨주어야 했다.
19세기 초 예술의 변화를 둘러싼 보수적 비평가들의 진단은 최근까지도 이 시기를 설명하는 지배적 관점이었다. 비록 그 결론이 보수적 비평가들과는 정반대로 가기는 하지만 이 시기 자체에 대한 분석은 비슷했다. 한 마디로 이 시기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혼란의 시기였다. 보수적 인물들에게 그 혼란은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무너트린 결과였고 오늘날의 학자들에게 그것은 현대 예술이라는 미래가 아직 오지 않은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19세기 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잔 지그프리드의 글 <대안적 내러티브 Alternative Narratives>는 그러한 인식의 단편을 보여준다. 저자는 19세기 초가 위계의 붕괴와 과잉의 시대였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특징이 혼란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 가능성을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요약한다. 첫째, 역사화에 가려져 낮은 위치를 차지했던 장르, 주제들에 대한 중요성의 증대. 둘째, 회화 이외의 매체에 대한 실험의 증가. 셋째, 부분과 전체의 관계 변화. 저자는 각각의 경향을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증하면서 이 시기가 혼란의 시기가 아닌 다양성이 개화한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경향을 언급함에 있어 저자가 주목한 것은 여성 작가들이다.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이나 안젤리카 카우프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혁명 이전에 유럽의 여성 화가들이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일은 드물었고 그 때문에 살롱에 출품할 기회 또한 적었다. 혁명 발발 이후 자유의 정신에 입각해 살롱이 모두에게 개방됨에 따라 초상화 분야에서 한정된 고객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많은 여성 작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그 문은 얼마 안 가 닫혔지만 그 짧은 시기 동안 여성 작가들은 프랑스 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마리드니스 빌레르(Marie-Denise Villers, 1774-1821)의 작품 <자연을 배경으로 한 여인 습작>(1802) 혹은 <신발 끈을 묶는 검은 옷의 여인>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이자 화면의 중심에 위치한 신발끈 묶는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당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고전과 동시대 풍경의 혼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 독해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모델의 동작 그 자체에 있었다.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이었던 고대 그리스 조각인 <샌들을 묶는 헤르메스>를 빼다 박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루브르의 조각이 신화 속 장면의 재현이라면 빌레르의 작품은 동시대 여인의 옷을 입고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런 변형은 풍속과 고전의 경계를 허무는 위험한 시도로 비쳤다. 헤르메스의 자세가 남성신의 육체를 재현함으로써 고전고대의 이상적인 미를 보여준다면 빌레르의 작품 속 여인은 그것을 동시대 패션 잡지에서 나올법한 무엇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대함에 있어 동시대인이 겪었을 혼란은 고전적 자세에 현대의 옷을 입혔다는 것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닿아있었다.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은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자문했다. 도대체 신발끈을 묶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안에 어떤 내러티브가 있는가? 작품은 동시기의 진지한 회화라면 으레 가지고 있어야 할 내러티브가 없었다. 마치 패션 잡지에서 그 시절 유행하는 옷을 보여준다는 목적 외에 아무런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작품 속 여인은 그저 동시대 여인들이 즐겨 입던 옷을 입고 신발끈을 묶고 있을 뿐이다. 화면 밖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여인의 눈은 이런 혼란의 화룡점정이다. 모델이 응시하는 화면 바깥에는 그녀를 기다리던 연인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몰래 쳐다보던 행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지금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동시대 프랑스인과 별 다른 바 없는 존재일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화가 제시하던 신화, 성경의 세계는 이제 19세기초 프랑스의 세계로 대체되었다. 창공을 날던 전령 헤르메스는 최신 유행에 민감한 프랑스의 여인으로 안착했다. 보수적 비평가들에게 이것은 일종의 추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완고한 장르 간의 경계를 타파한 선구적 한 걸음이었으며 역사화 속 영웅과 풍속화 속 보통 사람 사이를 비집고 탄생한 새로운 회화였다.
빌레르가 역사화의 형식을 빌려서 동시대의 세계를 묘사했다면 다른 방향을 추구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고전의 전거를 빌리지 않은 채 일부 비평가들에게 부적절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소재를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묘사했다.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짧은 생애 동안 이와 같은 목적을 다방면에서 성취했다. 오늘날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이라는 역사화로 더없이 유명한 작가이지만 생애의 많은 기간 동안 석판화, 장르화, 드로잉에 주력했으며 그것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1818년 작품 <러시아에서의 후퇴>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판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후퇴하는 프랑스 병사들의 모습은 과거 부상당한 퀴러시어 병사를 묘사한 거대한 작품과 동일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제리코가 매체에 따라 그 묘사 방식에 차별을 두지 않고 동일한 방식을 고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작품은 캔버스에 그린 원본을 복제한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원본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작품의 상업적 유통을 위해 석판화를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제리코는 매체를 선택함에 있어 각 매체의 위계가 아닌 주제 전달의 용이성을 중점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런던 체류 시기 완성한 일련의 작업들 또한 제리코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작품의 주제가 될 장소를 찾을 때 지역의 유명한 장소나 행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닌 도시를 작동케 하는 근원적 구조를 보여주는 곳을 찾고자 했다. 또한 소재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신문에 게재된 사건이나 통속 소설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들이 도시의 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양한 소재들을 원천으로 하여 탄생한 수채화, 소규모 유화 작업, 판화들은 지금까지도 19세기 초 런던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가령 <석탄 마차>(1821)에서는 눈부신 산업 발전의 이면에 놓인 전근대적 노동의 현실을 포착했으며 <석회 가마>(1822-1823)에서는 공장이 들어선 런던 시내가 아닌 외곽에 위치한 소규모 산업 시설에 주목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제리코는 성장하는 대도시 이면에 있는 영국인들의 생활을 음울한 색채로 묘사하고 있다. 런던 시기 작품들은 당시에 그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던 매체들에 대한 제리코의 생각을 반영한다. <메두사호의 뗏목>이 단지 해양 참사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프랑스 정부의 실책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그린 런던의 풍경은 단지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산업 발전으로 인한 산업 구조의 변화와 그로 인해 변화한 런던 사람들의 일상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그런 점에서 제리코는 자신의 가장 야심 찬 회화 작업에서 폭로했던 현상 이면의 구조적 측면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제리코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이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문제의식이었지 매체 간의 위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메두사호의 뗏목>에 버금가는 거대한 회화를 제작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했다는 증거들이 다수 있지만 그것이 석판화, 수채화, 드로잉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부차적이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외젠 들라크루아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씨름했다. 그렇게 완성한 <리에주 주교의 살인>(1829)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논란이 되었다. 하나는 그가 선택한 소재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소재를 묘사한 방식에 있었다. 우선 소재의 측면에 있어 논란은 동시대 소설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 있었다. 소설은 이 시기 신화, 성경, 역사를 소재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세속적인 영역을 다루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장르화 이외의 영역에서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구나 1820년대 거대한 역사화 제작에 몰두했던 들라크루아가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동시대 소설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 또한 작품에 대한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더 핵심적인 논란은 묘사의 측면에서 나왔다. 공개된 작품을 본 일부 평자들은 이 작품이 소설의 중요 장면이 아닌 아주 사소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들라크루아는 스코틀랜드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월터 스콧의 15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켄틴 더워드 Quentin Durward』(1823)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 월터 스콧은 최초로 역사 소설을 쓴 인물인데 평범한 개인이 거대한 사건에 말려들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철저한 고증에 기반한 역사적 묘사 속에 버무려내 큰 인기를 얻었다. 들라크루아가 선택한 장면은 윌리엄 드 라 마르크가 이끄는 반란군이 성에 침입해 리에주의 주교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주인공 켄틴 더워드가 말려들게 되는 수많은 사건의 일부분이며 심지어는 주인공 자신이 전혀 관여되어 있지 않은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다. 이를 반영하듯 들라크루아의 작품에는 주인공 켄틴 더워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학자들은 1980년대까지 주인공이 어디에 그려져 있는지 찾지 못했었다. 이것은 내러티브를 묘사함에 있어 전체 내러티브의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장면을 그려야 한다는 관례를 위배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사건의 중요 인물이라 볼 수 있는 두 인물의 행위는 전체 회화에서 마치 사소한 일부분처럼 다뤄지고 있다. 특히 주교 살해의 주범인 윌리엄 드 라 마르크는 배경 속에 묘사된 다른 인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려져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것은 어느 정도 들라크루아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주교와 그 주변 인물들 외에도 거대한 흰색 테이블과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 왁자지껄하게 모여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다소 산만해 보일 정도로 펼쳐놓았다. 이것은 중심 내러티브를 다른 사소한 요소들보다 강조해 관람자의 집중을 유도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동시대 비평에서 이 작품을 논하면서 주교의 죽음이 아닌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며 "병사들의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평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여러 회화적 구성과 장치들은 들라크루아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고전주의 회화가 제시하고 있듯이 역사는 결정적 사건 하나를 통해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복잡다단하여 한 개인이 그것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은 단지 역사적 사건의 일부분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주인공 켄틴 더워드가 리에주 지방을 둘러싼 권력자들의 암투를 주교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목격했듯이 역사 또한 개인에게 하나의 편린으로서만 다가올 뿐이었다. 들라크루아가 제시하고자 했던 역사상이 바로 이것이었다. 회화는 역사적 장소에 실제 있었던 인물들의 여러 장면을 펼쳐놓을 뿐이었다. 주인공이 주교의 살해를 지켜본 것처럼 작품을 보는 관객 또한 그렇게 펼쳐놓은 왁자지껄한 광경 속에서 어쩌면 역사적 분기점이 될 수 있는 혹은 단지 지나가는 하나의 비극에 불과할 수도 있는 사건 하나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때 그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은 회화가 아니다. 역사 그 자체가 사건의 중요성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시간을 따라 흘러가듯, 회화 또한 어떠한 하이라이트, 구성상의 강조도 없이 그저 제시만 할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들라크루아는 역사 속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 주인공이 아닌 목격자에 주목했다. 이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개인이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했다. 이 무렵 유럽의 도시는 하루아침에 거대한 공장이 되었고 익숙했던 자연환경에는 마차를 위한 도로가 뚫리고 부르주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록 그 시대적 변화는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선 변화에 비해서는 아주 미약했지만 당대인들에게 그 변화는 충분히 따라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회화 영역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회화 속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어야 하며 주요 인물은 그 내러티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원칙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회화 또한 단지 사건의 단편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봉착했던 문제는 비단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 것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원정을 소재로 한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 1789-1863)의 작품 <콘스탄틴 공성 Siege of Constantine>(1838-1839)은 그 사례 중 하나다. 작품은 거대한 삼폭 제단화 형식으로 시간에 따른 전투 전개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자체가 전쟁을 주제로 한 역사화에서 전투의 중요한 순간을 화폭에 담아낸 것과 차이가 있다. 이것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사건의 일부분 혹은 목격자로서의 관람자를 설정한 들라크루아와는 다르게 고무줄처럼 사건의 시간선을 늘려 세 개의 화폭에 담아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삼폭 제단화라는 문법과 결합하자 독특한 결과물이 나왔다.
우선 세 작품의 중앙에 위치한 작품은 그것의 위치와 어울리지 않게 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파노라마처럼 인물의 행동이 아닌 풍경에 큰 비중을 둔 것이나 각각의 병사들의 행위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 강화된다. 심지어 보다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좌우의 작품들과의 대비는 이러한 특징을 더욱 강조한다. 그림 속에서 묘사된 사건의 흐름을 따라갔을 때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마지막 세 번째 회화에서 나타난다.
세 번째 장면은 무너진 성벽을 통해서 도시에 진입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품의 중앙에는 이 전투의 지휘자이자 루이 필리프의 둘째 아들인 루이 왕자(네무르 공작)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작품이 베르사유 궁에 걸릴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런 강조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강조가 과거 동일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던 회화와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복장을 입은 병사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이다. 이것은 전투를 묘사함에 있어 영웅의 행적을 묘사하고자 했던 과거의 경향과 다르게 군대의 움직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전투를 묘사하는 일은 동시대 화가들에게 꽤나 어려운 일로 여겨졌는데 집단 전술과 포병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의 행동이 부각되기 힘든 전장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심지어 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19세기의 전투 환경에서는 한낱 군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것은 지휘관에 대한 묘사가 근처에 있는 병사의 묘사와 비교했을 때 그 세부 묘사에 있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베르네가 이 작품 속 인물을 묘사한 방식은 들라크루아가 직면했던 역사 속의 개인이라는 문제가 단지 역사의 문제뿐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품에 있는 그 어떤 인물도 세 폭의 회화 작품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다. 오라스 베르네의 회화 속 병사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분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중반 크림 전쟁의 발발로 전쟁의 끔찍한 진실이 부각되자 더욱 심화된다.
마리드니즈 빌레르, 테오도르 제리코, 외젠 들라크루아, 오라스 베르네의 작품들은 19세기 초 역사화의 위기 앞에서 그것의 균열을 뚫고 나와 근대 미술의 새로운 조류를 만들었다. 이런 변화는 1차적으로는 프랑스혁명 이후의 시대적 상황과 연결될 것이다. 비록 혁명적 단절인지 아니면 완만한 변화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늬만 바꾼 현상 유지인지 명확한 답을 내리긴 힘들겠지만 19세기 초는 직전의 18세기 말과는 분명 다른 세계였다. 이런 변화는 보수적인 화가와 비평가들에게는 미술 전통의 붕괴를 초래한 위기와 파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변화는 새로운 세상을 묘사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진 예술가들에게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변화된 세상을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가 글에서 언급한 작가들과 작품은 과거와 동시대의 차이에서 발생한 긴장 관계 속에서 '대안적 내러티브'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그것은 고전적 규율과 현대적 풍속을 결합하거나 기존에 무시받은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이야기 전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는 등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보다 근원적으로 볼 때 예술이 무엇을 묘사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 속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술가들의 답은 단지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19세기 내내 이어지며 현대 예술이라 불리는 새로운 경로를 노정했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초는 보수적 비평가들과 오늘날의 몇몇 학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어중간한 혼란의 시대가 아닌 다양성이 개화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