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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Dec 12. 2023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아틀리에

피에르나르시스 게렝과 프랑스 낭만주의

원문 : John P. Lambertson, The genesis of French romanticism : P.-N . Guerin’s studio and the public sphere,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Illinois, 1994)
프랑스 낭만주의의 기원: 피에르나르시스 게렝의 화실과 공론장


근대 미술에서 프랑스 낭만주의의 역사는 곧 저항의 역사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전후로 화업을 시작한 젊은 화가들은 신고전주의를 고수하는 스승들의 화풍이 지나치게 딱딱하고 몰개성 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스승의 교습 방식을 거부하고 공공연하게 그들의 지침을 무시했다. 이 반항의 대표주자이자 이미 프랑스 살롱에서 한 차례 논란을 일으켰던 제리코를 시작으로 젊은 화가들은 화실을 뛰쳐나와 자신들의 화풍을 개척했다. 그리고 그들이 1824년 살롱을 기점으로 프랑스 예술계의 전면에 나섰을 때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치열한 대결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초 낭만주의의 탄생서사는 이렇듯 기존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점철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낭만주의에 대한 최초의 정리를 시도했던 많은 논자들은 이러한 서사를 역사적 사실로 소개하며 이를 예술가의 독립성 연결시켰다. 이런 관점은 20세기 중반까지 낭만주의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으로 굳어졌다. 이 시기 낭만주의 화가들의 탄생은 예술가 개인의 기질뿐만 아니라 작품의 형식적 특수성과도 연결되었다. 


이러한 신화가 의문시된 것은 1990년대의 일이었다. 이 시기 18세기말-19세기 초 프랑스 미술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단순히 보수-진보로 나눌 수 없는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새로운 면모들이 드러났다. 물론 학계 내에서 이런 재평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월터 프리들랜더는 1950년대에 낭만주의자들의 아치 에너미로 여겨지던 작가들의 자유주의적 면모를 조명하며 그들을 하나의 성향으로 재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1973년 알버트 보임은 아카데미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에서 그것이 이후 등장할 새로운 양식의 토양을 제공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낭만주의의 창조 신화에 균열을 낸 것은 199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였다.


피에르나르시스 게렝(Pierre-Narcisse Guérin, 1774-1833)은 1990년대를 전후로 하여 그 평가가 정반대로 달라진 대표적 인물이다. 제리코, 들라크루아, 샹마르탱, 코그니에 등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을 길러낸 게렝은 과거 연구에서 제자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억압하는 권위적인 스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일련의 연구를 통해 게렝이 제자들과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는 스승이었으며 자신과 다른  화풍을 지향하는 제자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한 대가들의 탄생 신화에서 클리세처럼 등장하는 "스승의 방식에 실망감을 느끼고 화실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모색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실제 낭만주의 탄생 과정과 다르며 오히려 교육 과정을 마친 뒤에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활발한 교류가 존재했었음을 뒷받침하는 여러 사료들이 발굴되었다.  


존 램버트슨의 박사 학위 논문 「프랑스 낭만주의의 기원: 피에르나르시스 게렝의 화실과 공론장 The genesis of French romanticism : P.-N . Guerin’s studio and the public sphere」은 90년대 영미학계에 불어닥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글이다. 글은 피에르나르시스 게렝의 교습 과정과 제자들 간의 교류 관계를 상세하게 밝히며 그것이 어떻게 낭만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는지 분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1810-20년대 게렝 제자들의 교육 과정과 에콜 데 보자르에서의 활동, 살롱 출품작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시도해 이때까지 정설처럼 여겨지던 몇몇 의견들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피에르나르시스 게렝,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 1799,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피에르나르시스 게렝은 혁명기 미술계의 대표적인 슈퍼스타였다. 1799년 살롱에 제출한 <마르쿠스 섹스투스의 귀환>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거장이 탄생했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이러한 인기는 나폴레옹 집권기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화가 자신의 명성은 곧 그가 운영했던 화실의 명성과도 직결되었다. 당시 개인 화실은 화가 자신의 명성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공식 미술 학교인 에콜에 얼마나 들어갔느냐에 따라 그 명성이 결정되곤 했다. 게렝의 화실은 1808년부터 1815년까지 총 20명의 에콜 입학생을 배출했는데 동시기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인 다비드의 화실이 21명의 입학생을 배출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시 게렝이 가지고 있었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폴레옹의 몰락이 확실시될수록 게렝 화실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갔다. 일례로 1816년 다비드의 가장 충실한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그로의 화실은 단 2명의 에콜 입학생을 배출한 것에 비해 게렝의 화실은 9명의 입학생을 배출하며 프랑스의 화가 지망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화실로 거듭났다.


이 시기 개인 화실을 운영했던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게렝의 화실 또한 에콜 데 보자르의 입학과 로마상 수상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였다. 비록 오늘날 게렝이 어떤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없으나 단편적인 기록들로 유추했을 때 그의 화실은 소묘를 중시하는 동시기 다른 화실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판화 모사, 석고상 모사, 모델 모사라는 순서를 따르며 모델을 모사하는 과정의 경우 머리만을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전신 모사, 동작 모사라는 단계를 거쳤다. 또한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대상의 윤곽선을 소묘하는 과정을 시작으로 선을 이용한 음영 표현을 배우고 이 과정이 숙련되면 중간톤과 그라데이션을 배우는 단계로 넘어갔다. 


(좌) 티치아노, <그리스도의 매장> // (중앙) 테오도르 제리코, <그리스도의 매장> // (우) 외젠 들라크루아, <그리스도의 매장>


이러한 정석적인 과정과 함께 게렝은 제자들에게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꾸준히 모사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그는 루브르에 전시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을 사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게렝은 루브르의 작품을 사생함에 있어 그것을 똑같이 베끼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방식대로 거장의 작품을 스케치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교습 방식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회화에 대한 철학과 연결된다. 게렝은 1816년 그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명작을 그대로 베끼는 방식은 그것이 가진 혁신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기술적 측면만을 모방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했다. 과거의 것을 배움에 있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따라 해보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작품의 정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사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게렝의 교습 방식은 그 자체로 고전 미술의 모방이라는 틀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티치아노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1523-1526)를 스케치한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이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일 것이다. 티치아노의 작품과 다르게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인물과 배경을 그림에 있어 마무리 과정과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붓질의 흔적을 작품 표면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두 화가의 스케치는 고전의 레파토리를 유지하면서도 형식이나 구성의 측면에서 극적인 변화를 주는 이후 작품들을 예견한다. 


게렝이 배출한 제자들 중 오늘날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이후 세대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화가는 테오도르 제리코일 것이다. 1810년부터 1816년까지 게렝의 스튜디오에서 수학했던 제리코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을 가감 없이 표현한 바 있다. 또한 자신의 대표작이자 낭만주의의 시작을 알린 <메두사 호의 뗏목>(1818-1819)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기도 했다. 작품 완성 과정에서 게렝의 조언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게렝은 한 시간 넘게 제리코의 작품을 감상한 뒤 그의 작품을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작품의 구성적인 측면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 영향으로 제리코의 작품은 고전적 역사화에서 즐겨 쓰던 피라미드 구성이 보다 강조된 형태로 완성된다. 또 다른 제자인 들라크루아는 1815년 화실에 들어와 1822년 게렝의 화실이 문 닫기 전까지 그곳에서 수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낭만주의의 초기 역사를 다루는 많은 글에서 들라크루아가 게렝의 화풍을 선호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지만 8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그의 화실에서 배웠다는 점은 작품에 대한 선호와 별개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게렝과 제자들 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은 경제적인 문제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 화가 지망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국가 보조금을 받는 것은 그런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당시 정부는 재능 있는 화가지망생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그들이 계속해서 화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보조금을 지급함에 있어 정부는 살롱과 같은 공개적인 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젊은 화가들을 지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명망 있는 스승의 추천에 기반하여 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렝이 자신의 제자인 샹마르탱을 추천한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오래전부터 샹마르탱 가문과 인연이 있었던 게렝은 그의 가문이 급속도로 몰락해 곤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게렝은 당시 프랑스의 예술 정책에 깊게 관여하던 포르뱅에게 자신의 제자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가치가 있는 젊은 화가라는 점을 강조한 추천서를 보냈다. 그 결과 샤르망탱은 1817년부터 1821년까지 3280프랑의 보조금을 받으며 화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렇듯 낭만주의에 대한 초기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게렝은 단지 뛰어넘어야 할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게렝은 자신과 성향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들 또한 여러 기록에서 선생에 대한 존경을 대내외적으로 말했으며 그들의 교우 관계는 정식 교육 과정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흔히들 낭만주의는 예술가 개인의 기질과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 예술가를 상상한다. 하지만 프랑스 낭만주의를 장식했던 예술가들에게 있어 스승의 존재는 그들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할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이었다. 게렝의 화실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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