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밀다
때밀이를 끊은 것이 20년도 훨씬 넘은 듯하다. 미국에도 한국식 찜질방에 가면 '바디 스크럽'이라고 하여 외국인들도 세신사 분에게 몸을 맡기는 일을 종종 본 적이 있었지만 정작 나는 찜질방에는 가더라도 때를 밀지는 않았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시절, 한 시간 반 북쪽으로 올라가면 '다이아몬드 바'라는 이름도 예쁜 중국인 커뮤니티 밀집 지역에 대형 한국식 찜질방이 생긴 적이 있어 그곳에는 엄마랑 몇 번 간 적이 있다. 10번 회원권을 끊으면 한 번은 덤으로 주는 '프로모션'을 진행 중에 있었고 주말마다 열리는 찜질방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하면 한국행 비행기표도 준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살던 샌디에이고 동네에도 한인타운 근처에 찜질방이 오픈을 했었지만 손바닥 만한 동네에서 아는 동포들과 벌거벗고는 도저히 못할 노릇이라는 생각에 가려면 차라리 얼굴이 팔리지 않게 멀리 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찜질을 하고 아로마 마사지 후 매점에서 미역국에 밥을 먹는 풍경은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입욕 문화이다. 동네 대중탕에서 각 가정의 샤워 부스에 이어 찜질방 스파까지의 기억. 이 모든 것이 팬데믹 이전의 일이고 지금은 더 누리고 싶어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때를 정해놓고 숙제처럼 밀던 때가 있었다.지금으로부터 그 옛날 80년대의 기억이다. 집에서 매일 샤워를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대중탕에 갔다. 겨울에는 머리도 일주일에 한 한번만 감았는데도 반질반질 윤이 났다. 목욕탕을 가득 메운 인파와 수증기는 피크타임에 잘못 가면 맞이하는 인산인해 (人山人海)의 풍경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집에서 매일 샤워를 하게 되었고 그렇더라도 목욕탕에 직접 가서 때를 미는 행위는 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는 의식과도 같은것은 나 만의 추억일까? 나에게는 이러한 일반적인 때밀기의 기억에덧붙여진 특별한 ‘때밀기' 경험 즉, 목욕탕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다. 바로 남탕에서 때를 밀던 기억이다.
연년생으로 남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외갓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자란 나는 터울 많은 사촌 언니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다가 탕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목욕물에 빠지고 말았다. 엄마 아빠 없이 아이가 다쳤을 때 그 원망과 탄식. 말은 안 했어도 대 놓고 내색하지 않아도 어색 해 졌을 모양이 연상된다. 그 후로 엄마가 데리고 다닐 수 없으니 아빠가 나만 떼어내서 남탕에 데리고 다니셨던 것이다. 다 자라서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남탕에서 목욕을 해 봤다는 여성들이 제법 된다. 물론 그 수를 통계 내 보지 않았지만 남자아이들이 여탕에 가는 경우가 여자아이들이 남탕에 가는 수 보다는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한 반 남학생들이 꽤 고학년까지 어머니 손에 이끝려 여탕에 온 적을 목격한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때밀이 경험은 특별한 편이다.
남탕과 여탕은 엄청 큰 차이가 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여탕은 엄마랑 가고 그러면 아프게 때를 밀어야 하며, 남탕은 아빠랑 가서 그냥 놀다 오면 된다는 것이다. 여탕의 때밀이 침대는 일자로 누워있고 남탕의 때밀이 침대는 등받이가 45도 각도로 되어 있어 앉아서 밀게 돼 있는 것이 또 차이점이다. 80년대 초 우리 동네 목욕탕에 대한 '메모리'를 바탕으로 쓴 것이니 다른 동네는 안 가봐서 잘 모르겠다.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여탕의 한증막에는 빨래가 널려져 있어 가끔씩 세신사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다 걷어 가지고 나오셔서 몽땅 버리겠다고 소리 지르는 광경을 볼 수 있었고 남탕에 손님들은 빨래비누를 가지고 목욕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탕은 사람이 비교적 많고 남탕은 여탕보다 붐비지 않는 편이며 나는 항상 그곳에서 홍일점이었다.
아빠가 목욕을 가자고 하면 잽싸게 챙겨야 할 것이 있다. 소꿉놀이 바구니에 소꿉장난이랑 마룻인형등 플라스틱으로 된 물놀이 용품을 챙겨야 손바닥이 부르트게 놀다 올수 있다. 재수 없게 놀잇감을 챙기다 걸리는 날이면 얼른 불투명 비닐 봉지를 하나를 구해 잽싸게 장난감을 숨긴다. 우리 동네 목욕탕에는 라돈탕이라고 하는 형광 초록색 미끌 미끌한 탕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활 속 방사선 물질이라 하여 침대 매트리스 등에서 라돈 수치를 측정하지만 그때는 목욕을 다 마친 사람들만 특별히 방사능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여탕은 라돈탕이 항상 붐볐지만 남탕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방사능에 내 몸을 적극적으로 담그고 내 장난감을 가지고 감기에 걸릴 때까지 거기서 놀았다.
일단 아빠와 목욕탕에 가면 나는 돌아다니면서 놀거나 인형이랑 라돈탕에 가거나 삼강 사와, 오란씨를 마음껏 먹으며 즐길 수 있다. 이것도 차이점이다. 엄마랑 가면 우유만 먹어야 하고 어쩌다 flavor 우유 정도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이니 우유만 보면 토했던 시절이어서 쵸코 우유도 딸기 우유도 목욕을 가는 것도 모두 고역이었다. 하지만 자유로움도 아주 잠시. 아빠랑 목욕을 다녀오면 특히나 겨울에는 반드시 감기에 걸리고 오므로 애좀 잘 보라고 엄마가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시다 결국 나는 여탕으로 좌천되어야만 했고 엄마는 우리 삼형제를 모두 데리고 목욕탕에 다니셔야만 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더 어린 어머니는 천둥벌거숭이들 셋을 데리고 그 사람 많은 인파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가 한 명씩 씻겨 내보내야 했으니 그 일이 여간 노동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큰 애부터 씻겨서 내 보내면 큰아이들은 역할이 있어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데 언니는 발가벗고 혼자 실내 자전거를 타고 열쇠를 맡기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수를 타서 먹었다.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니는 주위에 없었고 내가 엄마 나올 때까지 남동생의 옷을 입혀 놓고 둘이 땀을 뻘뻘 흘리고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다고 온전했을 당시 엄마의 기억이 전한다. 겉옷부터 속옷 순서로 거꾸로 입혀 놓아 남동생은 슈퍼맨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머리부터 다 젖어 다시 씻겨야 했지만 엄마는 나를 몹시 뿌듯해하셨다. 아기에서 어린이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때를 밀고 사는 삶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때 하던 것을 지금도 하며 살 줄 알았다. 코로나까지 공격한 이 마당에는 오늘 하던 것을 내일 할 수 있을지도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때는 나중에 크면 때를 밀다 어떤 음료를 마실까 상상하며 꿈나래를 폈던 기억도 있다. 지금 내가 즐겨하고 있는 나의 일상 어느 부분은 그때 그 시절 때밀이의 추억처럼 역사가 되어 뒤로 밀려 날 지 모를 일이다. 흘러가 버린 시간 속에서도 그때 할 수 있는것을 잘도 하며 살았구나. 그런데 지금 이 시절 내가 하고 있는 일상의 때밀이는 무엇일까? 그때는 했고 지금은 할 수 없는 시간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