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3) 리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럴 줄 몰랐지?”라며 좋은 의미로 뒤통수를 가격하는 영화다.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강렬함도 없고, 상영시간도 짧아졌다. 영화 스타일, 미장센, 연기 방식 등 모든 지점에서 이전 작품들과 궤를 달리한다. 작품의 훌륭함을 떠나, 그가 아직도 보여줄 것이 차고 넘치는 창작자라는 점에 탄복하고 만다.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해 온 중요소재인 ‘연극’도 사라졌다.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영화적인’ 영화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쇼트와 음악을 불현듯 끊어내는 카메라의 개입, 느닷없이 울리는 총성까지 영화적인 특성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처럼 보인 단순한 플롯도, 엔딩 시퀀스에 이르면 하나의 거대담론을 위한 영화적 장치로 기능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대단하다.
숲을 올려다보는 오프닝의 트래킹 쇼트는 ‘올해의 오프닝 상’이 있다면 주고 싶을 정도다. 오프닝은 수직의 앙각으로 나무, 숲의 이미지를 나열하며 시작되는데, 중간에 오프닝 크레딧을 보여준 뒤에도 멈추지 않고 몇 분에 걸쳐 지속되다, 하나가 나오며 갑자기 끝난다.
이상할 만큼 긴 쇼트는 ‘누군가 하늘을 쳐다보며 걷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사람의 걸음이라기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지 않나. 관객은 트랙 레일을 가지런히 달리는 카메라의 존재를 상상하게 되고, 나아가 해당 시점 쇼트의 주인공이 어쩌면 초자연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도달하게 된다. 카메라 개입을 드러내 ‘영화적 영화’란 특성을 알리고 이후 전개될 초자연적 테마까지 암시하는, 알짜배기 정보로 가득 찬 오프닝이다.
오프닝의 절묘한 트래킹 쇼트는 다양한 자연물의 시점 쇼트로 이어진다. 땅와사비의 시점으로, 사슴의 사체 시점으로 바라보는 인간. 자연이 인간을 응시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인간 존재의 미약함을 상기시킨다.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 냇물을 긷는 씬,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써는 씬까지 의아할 정도로 긴 롱테이크 또한, 광대한 자연 속에 인간이라는 우연적이고 미약한 존재가 과연 공존을 도모할 자격이 있는지 도리어 관객에 묻는 듯하다.
쇼트는 카메라로 찍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지금껏 시점 쇼트를 쓴 적이 없다. <악존>은 그가 커리어 처음으로 카메라와 쇼트, 그리고 영화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흥미로운 도전인 셈이다. 그는 롱테이크 기법도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등장인물과 관객 간 정보 차이를 두는 방법으로써 탁월하게 작동시키고 있다.
물이라는 건 낮은 데로 흐릅니다.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줍니다. 환경보전 어쩌고 거창한 소리가 아닙니다. 상류에서 벌인 행동은 계속 쌓이고 쌓여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글램핑장 설명회 종반부, 마을회장 스루가의 대사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도시는 상류, 시골은 하류로 비유되며, 이에 비롯한 위상 차이는 동선 방향으로 구분된다. 냇물은 카메라의 먼 쪽(상류)에서 가까운 방향(하류)으로 흐른다. 도시의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탄 차는 카메라로부터 먼 방향으로 이동하며, 시골의 타쿠미가 탄 차는 카메라에 가까운 방향으로 이동한다.
상류의 타카하시가 악의 없이 무심코 던진 말들이 쌓이고 쌓여 충격적인 엔딩을 초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요약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주제가 ‘환경보전’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다.
단순히 도시와 자연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는 악, 자연은 선? 이런 얄팍한 도식화를 비웃듯 타쿠미는 가해자, 타카하시는 피해자가 된다. 이때 한 번 생각해 보자. ‘타카하시가 과연 그 정도로 잘못했는가?’
앞서 언급한 상·하류의 위상차는 빈번히 전복된다. 설명회에서 상류의 역할을 했던 타카하시, 마유즈미는 회사에서는 명령에 따르는 하류가 된다. 타쿠미 또한 우동 가게 카츠오 부부 앞에서는 상류가 된다. 상류의 냇물을 하류에 떠다 주고 있으니. 이렇듯 영화가 말하는 위상 차이는 늘 상대적인 것이고, 이 세계에 절대적인 악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타쿠미가 저지른 극단적인 행동은 ‘악’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조차 고작 이주 3세대에 불과하다. 자연을 대표한다고 할 처지가 못 된다. 자연과의 공존, ‘밸런스’에 집착한 이유도 정작 그 자신이 나무를 베고 물을 길으며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생명을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타카하시가 과연 그 정도로 잘못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타쿠미가 왜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분노했는지 고민해 보자. 타쿠미는 자신은 시간도 없고, 돈도 궁하지 않다며 관리인직을 거절하는데, 이후 타카하시가 마을에 융화되려는 노력을 보여주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물론, 나쁜 쪽으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 장작 패기를 단 한 번 해보고 “기모찌”를 외치는 실없음, “사슴은 어디로든 가겠죠”라고 말하는 무신경함. 겉으로는 화합을 말하지만, 타카하시는 마을에 ‘소속’되고 싶었을 뿐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그는 본질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터전을 좀먹는 외지인일 뿐이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다시 말해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물은 기본적으로 자기 보존의 본능을 지녔다. 자신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외부 존재를 제거하는 본능적인 행동을, 선악의 논리로 해석할 수 있을까?
작중 타쿠미는 몇 번이고 경고했다. 야생사슴이 인간을 공격하는 희박한 확률은 상처를 입은 상태거나, 아비, 어미 사슴이 새끼와 함께 있을 때라고. 그는 이미 아내를 잃어 ‘상처 입은 사슴’의 상태였다. 건망증을 앓는 이유도 어쩌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딸 하나까지 잃었으니, 타쿠미의 폭력은 우발적인 범죄가 아닌 필연적인 자기방어인 것이다.
하나가 사슴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타쿠미의 환상 혹은 초자연적 연출로 보인다. 타쿠미는 사슴이 아니라 하나가 쓰러져 있는 광경을 봤을 것이다. 하나의 죽음 또한 사슴의 공격이 아닌, 사냥꾼의 오인 사격 때문이라 본다. 타쿠미는 이 비극의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당신이 오늘 갑자기 마을에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하잘것없는 글램핑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지만 않았어도, 그 시간에 하나를 챙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바이러스에 악의가 있을까? 작중 팬데믹은 ‘악의 없이 다가오는 악’이다. 현대 과학은 바이러스를 생명체로 규정하고 있진 않지만, 숙주 세포를 통해 빠른 속도로 번식하며 ‘늘어나려는 성질’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과 닮았다. 이미 <기생수>에서 논의되었던 주제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포체일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
자연의 섭리와 인과율에 선악은 없다. 인간은 예로부터 이 간단한 명제를 이해하려 신앙에 의존하거나 과학을 연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애썼다. 그러나 인간은 미약한 존재다. 인지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자연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할 수 없다. 구조와 선후관계 정도를 파악할 뿐이다. 대부분의 생명현상은 자연 상태에서 비가역적이다. 팬데믹이 불러온 변화도 그렇다. 타쿠미는 이러한 비가역성을 통제하지 못해 발광해 버린 인간으로 보인다.
엔딩은 오프닝과 수미상관이다. 이제 관객은 안다. 사람이 하늘을 보는 것인지, 숲이 사람을 보는 것인지 섣불리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적인 사고 체계 자체가 자연을 향한 반란으로 보일 정도다. <악존>의 카메라 워크는 관측 불가한 자연을 제3자의 관점으로 그저 관조할 뿐이다.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판단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긴 시간 보여준다.
인간은 수학과 과학으로 구조적 실재론의 토대를 쌓아 올렸고, 이 형식이 세계의 모든 구조를 오롯이 반영한다고 믿어 왔다.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인식론을 통해 인간이 자연 세계마저 섭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론엔 경험적 적합성이 뒤따라야 한다. 직접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재미있다고 희희낙락 대던 타카하시가 죽은 것은 퍽 ‘자연’스럽다. 안개 낀 숲에서 헤매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