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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정령, 소녀의 눈으로 본 스페인 내전

<벌집의 정령> (1973) 리뷰

by 테리 Feb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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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업이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도 작은 기적은 종종 일어난다. 예컨대 연말에 재개봉한 <더 폴>은 10만 관객 돌파 기념으로 감독이 내한했으니, 인생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 <벌집의 정령> 국내 개봉은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기적으로 보인다. 극장 방문은 나날이 줄어들고, 블록버스터의 이름값만으로는 더 이상 실적을 보장할 수 없는 지금 시대에 이런 ‘전원일기’ 같은 영화가 정식 개봉하다니.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작년 11월 개봉해 고작 관객 수 9천 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시 말해 영화의 작은 기적을 믿어준 9천 명 덕분에, 같은 감독의 데뷔작이자 역대 최고의 스페인 영화로 평가받는 <벌집의 정령>을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켄슈타인>과 <벌집의 정령>

브런치 글 이미지 1

아나는 카스티야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5살 소녀다. 아나와 언니 이사벨이 어떤 영화를 보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이 극중극은 작품 속으로 깊게 침투하고, 아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을 찾는 일에 집착하게 된다. <벌집의 정령>이 내전 직후 1940년대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프랑켄슈타인의 발음은 꼭 ‘프랑코’를 연상케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타인,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외부인이다. 프랑코 체제가 배격해야 할 존재로 정의된다. 이런 강경한 철권통치의 문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에서 ‘괴물’은 여러 인물로 존재한다. 소통할 수 없는 아버지, 도망친 군인, 테레사와 헤어진 연인. 무수히 많은 괴물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함에도 화합이 불가능한, 철저한 타자이다. 인류는 나와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며 타자 딱지를 붙임으로써 ‘우리’라는 형식적인 틀을 갖추며 생존해 왔다. 스페인 내전의 아픔을 담은 이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법칙은 동일하게 작동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1931년 개봉한 <프랑켄슈타인>은 첫 상영 당시 괴물이 실수로 소녀를 강에 던진 장면을 검열하여 최종본에서 삭제했다. <벌집의 정령>에 나온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아나는 이사벨에게 괴물은 왜 사람을 죽였고, 괴물은 왜 죽었는지 묻는다. 이사벨은 영화 속 죽음은 전부 거짓이며, 괴물은 사실 정령이며 영혼이 되어 우리 주위를 떠돈다고 답한다. 아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괴물, 또는 정령을 직접 만나고자 하는 의지로 번지게 된다. 외부 세계와 접촉하고 타자와 교감하려는 소녀의 순수한 시도다.


이때 <프랑켄슈타인>이 검열되었다는 정보는 <벌집의 정령> 등장인물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만 알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실제 관객이 영화 속 마을 사람들처럼 괴물을 의심했듯, 아나 또한 괴물이 소녀를 죽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독특한 정보의 교란은 관객과 등장인물을 특정 방향으로 오도하게 한다. 괴물 존재의 본질에 대해 열중하게 된 아나는 배우이자 동시에 관객이다.


괴물에겐 이름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그것이 창조주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즉, 프랑켄슈타인은 사회적 편의를 위해 부여된 죄수 번호다. 이름 없는 괴물을 타자화하고 처단하려면 먼저 명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괴물은 조커 같은 존재다. 누구든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누구도 아닌 존재. 전쟁의 희생양이자 폭력의 산물.


나와 다른 누군가를 배척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혐오보다 무지에서 오는 공포가 앞선다. 그런 의미에서 <벌집의 정령>은 <프랑켄슈타인>의 공포 모티브를 빌려 타인을 괴물로 규정하고, 폭력의 논리로 질서를 다스리려는 프랑코 정부를 강력히 규탄하는 사회 비판 영화다. 이 고전이 위대한 까닭은 시대를 거스르는 기개를 지녔을 뿐 아니라, 죽음의 이미지를 현상하는 공포 서스펜스 영화로서의 정체성까지 탄탄히 갖췄다는 데 있다.


지와 불안이 만든 공포

브런치 글 이미지 3

영화는 모두 거짓이라는 이사벨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아나는 끝내 정령의 존재를 믿기로 한다. 우물 앞 큰 발자국을 발견한 후 머지않아 폐가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의 정체는 도망친 군인이었으나 아나에겐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정령이었다. 아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옷과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신발 끈을 묶어주며 보살핀다.


<벌집의 정령>이 공포 영화로서 특별한 지점은 아나와 군인의 조우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을 편견 없이 받아들인 유일한 소녀를 직접 파괴했던 것처럼, 타자이자 괴물인 군인과 만난 아나는 소녀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스릴러는 아나가 군인을 괴물이 아닌 정령이라 굳게 믿으며 해소된다.


정령과의 만남도 잠시, 군인은 총살당하며 아나는 폐가에 남은 혈흔을 보며 그의 죽음을 직감한다. 괴물일지 모를 군인과의 만남이 주는 긴장감보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무심한 타자들로 구성된 사회에 순수한 소녀가 놓여있었다는 실상이 더 극심한 공포가 된다. 이 공포는 아나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이사벨의 말과 달리 정령의 죽음은 가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이 최종적으로 느끼는 공포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저마다 서로의 타자이자 괴물이 되는 상황이 곧 우리 현실의 삶과 같다고 깨닫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다.


영화의 가장 특별한 기능은 역시 현실의 재현이다. <벌집의 정령>은 그저 특정한 시대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외연까지 끌어들여 관객이 프랑코 체제의 스페인이 겪었던 불안과 공포를 체험하도록 한다. 영화는 내내 아나의 시선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기에,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은 타자가 되어 답답함과 무력함, 그리고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사벨과 죽음의 모티브

브런치 글 이미지 4

<벌집의 정령>에는 최초의 영화로 여겨지는 <열차의 도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죽음은 허구라고 했던 이사벨은 선로에 귀를 대고, 아나는 기차가 다가올 때까지 쭉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사벨은 먼저 내려와 아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아나도 곧 선로에서 내려온다. 아나는 허구적 재현으로서의 영화(열차)를 바라보고,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죽음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유사 죽음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다.


아나와 이사벨은 대비되는 두 인물이다. 아나는 열차를 응시했듯, 군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듯, 돈 호세 마네킹에게 눈을 달아주었듯,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반면 이사벨은 기성세대 부모 내지 기득권의 사고를 체득한 인물로 보인다. 괴물의 죽음은 거짓이라는 노골적인 거짓말의 대가로, 이사벨은 아나와 달리 실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아나가 선로에서 체험한 유사 죽음은 후반부 숲속에서 버섯을 먹으며 한 번 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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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은 ‘죽은 척 장난’을 한 시점에 진짜 죽어서 정령이 되었다고 본다. 이사벨에게는 단순한 이미지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죽음의 증거가 빈번히 제시된다. 침실에는 천사가 아이를 데려가는 그림이, 아버지의 서재에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있다. 죽은 척 이후의 증거는 더 명확하다. 아나 외에 이사벨을 부르거나 바라보는 사람이 없으며, 버섯을 먹고 앓아누운 아나를 찾아온 이사벨이 앉은 침대는 텅 비어 있다. 검은 옷을 입고 모닥불 위에서 장난치는 이사벨은 영락없이 화장의 광경이다.


영화는 그렇게 총 4번의 죽음을 현상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죽음, 이사벨의 죽음, 도망친 군인의 죽음, 그리고 아나의 죽음이다. 여기서 아나의 죽음은 선로에서 체험했던 유사 죽음이 아닌, 결말과 관련된 영화적 죽음이다. 도망친 패전 군인과 접촉했던 현장에서 아버지에게 발각된 아나는 타자의 처지가 되어 도망친다. 이때 영화는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지만, 어쩌면 테레사의 전 연인이 공교롭게도 그 군인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따뜻한 색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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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아나는 아버지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밟아 짓이긴 독버섯을 먹고 프랑켄슈타인의 환상을 본다. 곧이어 구조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어머니 테레사는 의사와 대화를 나누며 이런 말을 한다. 아나가 밝은 빛을 싫어하고,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것 같다고. 대화가 이뤄지는 공간은 줄곧 반복되었던 벌집 모양의 창문 앞이다. 그들은 창문 너머로 아나가 싫어하는 밝고 노란 색깔의 빛을 받고 있다.


영화의 엔딩, 아나는 어둑한 밤에 깨어나 벌집 모양의 창문으로 향한다. 창문에는 어둡고 파란 색깔의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영화 내내 밝고 노란빛만 비추었던 아나 가족의 집에 처음으로 파란빛이 스며든다. 아나는 창문을 열고 “나는 아나야”라고 말하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영화를 지배했던 노란빛의 보색인 파란빛을 받으며 아나와 정령이 친구가 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아나가 영화에서 진정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장면으로 보인다. 이는 물리적인 죽음으로 보이기도 하고, 영화적 세계에서의 죽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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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테레사에게 무엇보다 아나가 살아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아나의 이상 행동에 관한 걱정을 일축한다. 영화 속 어른들은 하나같이 아이의 감정에 관심이 없으며, 노란 조명 아래 이루어지는 어떠한 행동도 그들의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강요한다. 그래서 아나가 파란 조명을 맞이하는 행동은 아마도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영화 속 세상은 이를 순순히 허락할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아나의 죽음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은유적인 것이든 간에, 아이의 순수함에 일절 무관심한 잔혹한 세계에서 ‘사실상’ 죽음에 다다른 상태와 같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까지 정령의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눈을 감을 뿐이다. 영화의 기적은 오히려 정령을 감춤으로써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재고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기에.


눈을 감으며 발생하는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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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의 시선으로 본 세상의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의 행동은 묘사되지만, 정확히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는 간접적으로만 언급된다. 테레사와 전 연인의 과거 이야기, 페르난도의 정치적 입장 등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상세 묘사가 불필요할뿐더러, 5살의 눈으로는 어른의 사정을 미처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나의 눈을 구실 삼아 만든 의도적인 정보의 격차와 플롯의 모호함은 정치적 탄압을 피하며 교묘하게 정권을 비판하기 위한 장치다. 실제로 <벌집의 정령>은 프랑코 체제 말기에 개봉되었다.


아나가 <프랑켄슈타인>을 보는 장면으로 예고된 순수한 시선은 엔딩에 이르며 죽음으로 환원한다. 이 죽음은 곧 영화적 세계의 죽음, 나아가 영화 자체의 죽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 죽음의 비극이 또 다른 탄생이자 흐릿한 희망의 발아임을 안다. 눈을 감으며 발생한 기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령처럼 분명 우리 주위에 존재할 것이다.


촬영 당시 5살의 아나 토렌트는 배역의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자 왜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냐며 ‘연기’의 개념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벌집의 정령> 출연 배우는 다들 본명으로 출연하게 된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작품의 메타적인 특성과 맞아떨어지게도, 아나는 영화 속 자신처럼 영화는 모두 가짜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하다.


50년이 흘러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아나 토렌트는 다시 한번 눈을 감는다. “Soy Ana(저 아나예요)”라는 똑같은 대사와 함께. <벌집의 정령>은 성장 영화이기도 한데,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나가 어엿한 성인 배우가 되어 불후의 명장면을 재연했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5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영화의 기적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장 극장에 달려가 <벌집의 정령>부터 관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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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에리세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이며 대표적인 과작 감독이기도 합니다. 최근 개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31년 만의 복귀작이었죠.


한 작품과 그 다음 작품 사이의 공백이 길다는 것은, 좋게 보면 하나의 영화을 구성하는 데에 그만한 노력과 시간의 힘이 투영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벌집의 정령>의 엔딩은 큰 감동을 주지만, <클로즈 유어 아이즈>까지 두편 모두 감상하길 추천합니다. 50년 만에 눈을 감는 아나 토렌트를 보고 어떤 씨네필이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글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연출 기법이나 곳곳에 산재한 은유적 상징들, 스페인 내전의 상세한 역사적 배경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5살 소녀 아나의 시선을 지긋이 따라가는 것, 어느새 자신도 영화 속 인물이 되어 짙은 여운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런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영화의 기적은 아직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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