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리 Mar 02. 2024

추락의 해부, 해부할 결심

추락의 해부 (2023) 리뷰

영화를 본 뒤 해부할 결심을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추락의 해부>는 언뜻 스릴러로 시작해 법정 드라마로 끝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끔찍할 만큼 현실적인 사회 풍자, 세태 비판이 담겨 있다.


사무엘의 사망으로 용의자가 되어 법정에 올라 낱낱이 해부되는 산드라, 재판에 참석해 미처 몰랐던 부모님의 심각한 불화까지 전부 알게 되는 11살의 소년 다니엘. 사실을 밝힌다는 명목 아래 추락하게 되는 소중한 가정, 그리고 재판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다니엘의 추가 증언 날에만 텅 빈 법정 방청석까지. 한 가정의 추락과 해부를 관음하는 청중의 모습에서, 오늘날 유명인의 사건사고를 하나의 가십으로 소비하는 우리 현대인을 비춰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제 법정에 참여한 듯 느끼게 하는 롱 테이크 촬영 기법 역시 “결국 당신들이나 이 청중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를 말하기 위한 완곡법이다.


추락의 모티브와 다양한 레퍼런스

영화는 제목의 모티브가 된 <살인의 해부>를 비롯해 <샤이닝>, <결혼의 풍경>, <라쇼몽>, 심지어 O.J. 심슨의 재판 다큐멘터리 등 정말 다양한 장르에 레퍼런스를 두고 있다. 초중반까지는 산드라의 살인 여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클래식한 범죄 미스터리로 보아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추락의 해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장르를 전환하며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채롭게 전함으로써 말이다.


한편 남편의 추락사로 용의자가 된 아내가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난다는 구조는 <헤어질 결심>을 연상시킨다. 추락과 하강의 이미지로 접근하면 플롯이 거의 동일하다. <헤어질 결심>은 높은 산에서 일어난 추락사로 시작해 바다로 내려간 뒤 아예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끝난다. 이 플롯에서 추락하는 건 물리적으로는 오프닝의 기도수, 엔딩의 서래이며, 더 넓게 보면 경찰로서의 자부심을 잃은 해준과 그의 가정이다. <추락의 해부>의 경우 높은 산 속 자택 3층에서 일어난 추락사로 시작해 저지대인 그르노블로 내려가며 하강하나, 재판 끝에 집으로 돌아와 높이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과정에서 추락하는 것은 사무엘, 산드라, 부부관계, 그리고 가정이다. <헤어질 결심>은 ‘미결’이기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됐다는 점, <추락의 해부>는 산드라의 살인 여부를 비롯해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활용한 영화는 아주 많다.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만 거론하더라도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계급 우화’ <기생충>, 하늘을 날고자 하는 로망과 지하 세계 판타지를 수직으로 오가며 표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대부분과 날아오르기 위해 하강하는 박쥐의 이미지를 3편에 걸쳐 녹여낸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등이 떠오른다. <추락의 해부>가 유달리 특별한 점은, 등장인물이 추락 혹은 몰락을 극복하고 다시 재기하여 상승한다는 이야기를 단순히 수직적 이미지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추락으로 인한 높이의 차이 자체를 중요한 요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를 교란하며 관객에게 정보의 격차를 의도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는 <애프터썬>이 떠오르기도 한다.


스눕 독(Snoop Dogg)과 사무엘

오프닝 시퀀스는 보더콜리 스눕이 2층에서 떨어진 공을 물기 위해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 사무엘이 작중 실제로 등장하는 장면은 없다. 부부싸움, 다니엘의 증언을 재현한 모습 모두 상상과 재구성이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제’ 보인 행동은 스눕에게 공을 던진 후 50cent의 P.I.M.P를 트는 것이다. 랩네임 Snoop Dogg과 50cent가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스눕과 사무엘이 동일시된다. 과거 스눕독은 P.I.M.P 리믹스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단어 ‘Snoop’은 ‘염탐한다’는 뜻이 있다. 사건 직후 인파로 붐비는 현장을 스눕의 시점 쇼트로 보여주는 씬은 스눕의 눈으로 사건을 관찰하는 사무엘의 시선을 보는듯 하다. 사무엘이 어떤 방식으로든 스눕이 되었다면, 다니엘의 대모 모니카가 사무엘의 사후 찾아와 주술사를 권하는 뜬금없는 장면도 설명이 된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스눕이 사무엘과 동일한 존재라는 가능성을 한껏 열어 놓는다.


사무엘이 개로 추락한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굴욕적이나마 지위를 회복하며 끝을 맺는다. 재판에서 승리한 후 산드라는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스눕이 옆자리로 올라온다. 서로 각방을 썼기에 서재에서 잠을 청하던 사무엘은 죽음을 지불해 개가 되어서야 산드라와 동등한 높이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각방을 쓰긴 했지만, 사무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던 산드라. 그녀는 사무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본 뒤 스눕을 꼭 끌어안고 잠에 든다. 그 표정에서 남편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이 느껴졌기에 더욱 섬뜩하고 여운이 깊은 엔딩이다.


엔딩에 이르러서 스눕이 계단을 내려가 떨어진 공을 물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전체 줄거리의 요약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공을 부부관계로 빗대어 생각해보면, 사무엘(스눕)이 추락한 후 부부관계를 회복하여 다시 상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따라 작가가 된 다니엘

유명 작가인 산드라는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조에와 소설 작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실제 경험만 소설로 쓰느냐는 질문에 “그건 진실이 아니다”, “일부만 떼 놓은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뱅상은 용의자로 의심 받는 상황을 억울해 하는 산드라에게 “진실은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이러한 초반부의 대화들은 이후 스토리 전개의 길잡이가 되는데, 영화에 제시된 실제 사건 외에는 전부 창작된 하나의 가설이기 때문이다. 중반부에 들어 변호사들이 재판 내내 끊임없이 주고받는 공방의 내용은 모두 진실 조각을 이용해 창작한 이야기이며, 관객은 제일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나 선택해 자신만의 사실선택하게 된다.


다니엘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으며 어머니의 재판에 영향을 끼칠지 모를 증언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 소년을 보며 마르쥬는 “확실하지 않더라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영화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란 점을 고려하면,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은 곧 ‘사무엘의 자살’이라는 이야기를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 어머니,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엘 역시 일종의 작가가 된 셈이다.


결국 <추락의 해부>는 다니엘이 작가가 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관객 또한 그 과정에 참여하며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메타적인 작품이다. 소설 속 인물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작가가 살인범이라면 스티븐 킹은 연쇄살인마냐는 대사는, 마치 산드라의 범행 여부를 관객이 자유롭게 결정하라는 메타픽션적인 발언으로 들린다.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의 불일치

보편적으로 영화의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는 동시에 제시된다. 그러나 <추락의 해부>는 두 정보를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해 사건을 상상하도록 만들며, 정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관객은 재판 내 증언, 녹음 파일 등 기본적으로 청각 정보를 바탕으로 사건을 파악하게 되는데, 이때 영화가 제시하는 시각 정보는 대부분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이 정보의 충돌은 재판 도중 부부싸움 녹취록이 공개되었을 때 가장 현격히 두드러진다. 처음에는 녹음 파일만 재생되다가 이후 플래시백이 나오게 되는데, 관객은 자연스럽게 시각 정보를 사실의 재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컵을 집어던지는 순간 플래시백은 중지되며 놀란 방청객들이 수근대는 쇼트로 전환된다. 몇 분 동안 진행되는 언쟁에 몰입한 관객은 녹취록의 청각 정보와 함께 제시된 해당 장면이 실제 발생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뱅상의 입을 빌려 환상과 가설이 마치 사실처럼 왜곡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다니엘은 마지막 추가 증언에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는 그날따라 음악도 틀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며 화두를 꺼낸다. 극중 시각장애인으로 청각 정보를 상징하는 다니엘이 만약 어머니를 위해 거짓을 꾸며냈다면, ‘아버지가 했던 말’ 이외에 쓸모없는 청각 정보는 확실한 증언을 위해서 제거하는 편이 유리하다. 50cent의 음악을 그렇게 크게 틀었던 사무엘이, 하필 재판 막바지에 다니엘이 떠올린 어떤 기억에선 음악을 틀지 않았고, 증언에 불필요한 다른 대화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 또한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플래시백 내내 사무엘의 모든 대사가 다니엘의 목소리로 재현된다는 부분증언이 창작이라는 데에 무게를 더한다. 영화의 귀나 다름없는 다니엘의 기억에 청각 정보는 없다. 그저 다니엘이 말하는 그대로의 입모양을 한 사무엘을 담은 시각 정보가 제시될 뿐이다. 음악도 틀지 않고, 증언에 필요한 말만 하는.


프랑스인 남성과 독일인 여성이 영국 런던에서 만나 가정을 꾸렸다는 다국적, 다언어 설정은 메타적 영화로서의 깊이를 더한다. 남편의 모국 프랑스 법정에서 재판받는 산드라는 완벽하지 않은 불어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양해를 받아 사용하는 영어조차 그녀의 모국어는 아니다. 녹취록의 부부싸움도 영어로 진행되며, 재판관들은 이 녹취를 불어로 번역된 자막과 함께 듣게 된다. 그리고 국내 관객은 이 모든 다언어적 요소를 한국어 자막으로 감상하기에 훨씬 더 극심한 청각 정보의 격차를 겪게 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자신의 의도가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다언어자인 산드라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어 자막에 의존하는 우리는 불어와 영어를 번갈아 가며 쓸 때 생기는 뉘앙스, 문맥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불어와 영어 모두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 청각 정보에 한계가 생기고, 시각적 요소에 편승하게 된다.


이러한 의도적인 정보의 교란은 곧 영화가 이야기를 선택하고 창조하는 이야기라는 메타적 특성과 연결된다.사무엘의 자살이 창작이었건 사실이었건 간에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때 판결 시퀀스의 연출법은 정말 섬세하고 미묘하다. 자신의 의지로 재판에 참석했던 다니엘이 의외로 판결 선고는 현장에 가는 대신 TV 화면으로 시청한다. 시각장애인인 다니엘이 판결을 TV로 ‘시청’하고, 판결 결과를 말하는 순간의 리포터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면서 들을 수 있는 것을 듣지 못하는 연출은, 그가 자신의 선택에 어쩌면 일말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무죄를 받은 산드라는 아들의 곁으로 돌아오지만 재판 과정에서 한 가정은 이미 속속들이 해부되었고, 다니엘이 작가로 등극함에 따라 끝내 추락하기에 이른다.



사건의 진실과 관계없이 한 개인, 가정이 도륙 나는 이야기라는 점에 우리네 현실이 투영되어 가슴이 아프다. 내게 <추락의 해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중년 배우의 이야기, ‘내가 죽어야 이 비난이 끝나겠구나’라고 생각한 웹툰 작가의 이야기였다. 마치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방청하는 듯한 생생함은 금세 불쾌함과 수치심으로 변모했다. 일상처럼 마녀사냥을 일삼는 대중, 눈곱 크기의 진실을 떼어 과장하고 죽일 듯 해부하는 언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추락을 비판하는 모습에서 나 자신의 위선과 비겁함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를 해부할 결심을 갖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