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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Feb 15. 2023

침묵으로 애도하고, 무관심으로 응원하기.

<금쪽같은 내 새끼> 엄마를 먼저 떠나 보낸 남매에게


가족상으로 얼마간 자리를 비웠다가 만난 사람에게 애도의 인사를 전하지 않는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모범문도 애도를 담아내기에 충분치 못하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는 상투적이라 짐짓 진심이 반감되어 전해질까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을 함으로써 충분히 슬퍼하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 없이 일상으로 복귀한 상대방에게 ‘당신 가족 잃은 사람입니다.’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다. 섣부른 위로와 사려 깊지 못한 말로 상대방이 슬플 일 하나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고인이 내 인생에도 비등하게 중요한 사람이라 동량의 추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직장에서는 더욱 침묵했다. 부의금을 보내며 마음은 전달하지만, 상대방이 일터로 복귀한 후엔 담백하게 일과 관련된 대화만 나누려 노력한다. 내가 그런 침묵을 하게 된 후로 상대방의 침묵 속에도 배려가 있음을 이해하게 됐다.


얼마 전 <금쪽같은 내 새끼>에 출연한 남매의 사연을 접하며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남매를 어떻게든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소문을 해서라도 어느 학교에 다니는 누구인지 알 수 없을까. 편지라도 써서 마음을 전할까. 도울 일이 있다면, 그 아이들이 잠시라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방송에 출연하며 남매가, 그들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엄마 없는 일상을 그저 묵묵하게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영화 ‘사토라레(2003)’에서 주인공 사토미 켄이치는 IQ180 이상의 천재 의사지만,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주변 이들에게 들려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들켜버리는 사람, 사토라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맛없어’라는 속마음이 방송처럼 송출되어 주변인들이 사토미 켄이치의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다. 정작 본인은 사토라레인 것을 모르고 있다. ‘사토라레 특별 관리 위원회’ 덕분이다.


1호 ‘사토라레’는 본인의 정체를 알게 되고 자살시도를 하는데, 그 생각마저 읽혀 끝내 자살을 하지 못하고 무인도에 은둔하게 되었다. 사토라레들의 천재성을 보호하고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토라레 특별 관리 위원회’는 사토라레를 발견했을 때, ‘모른 척 하기’라는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한다.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적인 생각을 필터링 없이 타인들과 공유해야 하는 핸디캡을 동시에 지닌 존재. 목적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핸디캡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공동체의 대처가 인상적이었다.


멀쩡히 일상을 잘 살아가고자 애쓰는 사람에게 연민과 동정은 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휠체어를 타고 공간을 나서는 사람에게 한참 남은 거리에서 문을 붙잡고 서있는 것은 배려일까 과잉된 연민일까. 요청하지 않은 위로나 도움이 때론 폭력보다 더 아플 수 있다.


얘들아. 생면부지의 이 아줌마는 너희가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단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바라시는 모습도 아마 그럴 것이야. 마음에 어둔 구석이나 깊은 슬픔은 없이 또래답게 그렇게 자라나길 바라. 하지만 그렇게 잊은 듯이 살아내려면 많은 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이 쓰이는구나. 지금 생명은 엄마에게 진 빚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너희 몫으로 가진 고유한 것임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멀리서 지향하는 마음만 보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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