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나는 ‘주기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마치 현실의 나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지 않을 때도 그랬다. 예를 들면 햇볕이 쨍한 한낮의 길거리를 걷고 있거나, 무심히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주인공 뫼르소가 생각이 났다. 뫼르소도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이방인의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첫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전해주는 어떠한 느낌이 나를 더욱 무심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내가 가족을 보지 않은 지도 한참이 되었다. 왜냐하면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서로에게 기대할만한 것이 전혀 없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이 말도 이방인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신기하다고 해야할 지 망설여졌다. 그저 각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이제는 명절이나 모임은 아예 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부담만 될 뿐. 모든 식구들이 모이는 경우는 딱 한 가지 뿐이었다. 누군가의 장례식.
이방인 속 주인공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살고 있는 시대가 다르며, 그는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뫼르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둘 사이에는 그다지 차이는 없다고 느껴졌을 것이고, 나도 그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최근에 나는 미술관에 가서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를 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작품은 철길의 석양이었다. 나는 그저 그 풍경을 실제로 그 장소에 가서 본 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마치 다른 세계로 한 순간에 이동한 것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으며, 황홀감에 도취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 했었다. 그 옆에는 철길 옆에 우둑 선 신호탑 뒤로 녹색 언덕과 함께 장관을 이루는 일몰을 묘사했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지당한 말이긴 했다.
비슷한 감정(일종의 슬픔,고양감)을 책을 통해서도 종종 경험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어떠한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면 나는 어김없이 그 순간으로 빠져들면서 감정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또다른 뫼르소였다. 그가 가족, 동료, 친구처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그의 솔직한 표현이 진심으로 와닿았기 때문에. 그전에 나는 종종 관계에 대해 죄책감 또는 당혹감을 느끼고 힘들어 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뫼르소를 통해서 나의 경험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었고, 나는 이방인을 거듭 읽었다. 호퍼의 작품도 다시 보고 싶다. 다만, 이방인은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지만, 호퍼의 작품은 그러지 못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철학적인 질문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