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온 줄
저 봐, 저 봐, 또 사과를 저렇게 많이 깎아 놨네~ 엄마, 아빠 왜 자꾸 저래?
부모님 댁에서는 몇 년 전부터 아침으로 사과, 계란, 커피를 드신다. 토스트나 치즈 같은 게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정해진 메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서 보면 아침마다 아빠(엄청 일찍 기상하심)가 사과 두세 개를 다 깎아 놓는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애들이 일어나서 사과를 먹을 때쯤이면 사과가 누렇게 변해 있고, 아이들은 그럼 사과가 썩은 거 같다며 안 먹으려고 한다. 그 사과는 점심때가 한참 지나도록 부엌 상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다.
멀쩡한 사과가 누렇게 변해서 천덕꾸러기가 되는 게 안타까워 몇 번이나 미리 깎아 놓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나왔더니 아빠가 또 사과를 왕창 깎아 놨다. 이상해서 엄마한테 아빠가 살짝 치매가 온 건 아닐까 하고 구시렁거렸더니 엄마 왈,
"너네 왔다고 그러는 거야, 우리끼리 있을 땐 아빠 한 번도 안 그러셔."
벌써 누렇게 변하기 시작한 사과가 예뻐 보였다. 애들은 그래도 썩은 거 같다고 안 먹을 테지만.
휴일 아침부터 어디를 간다고 외출 준비를 하시던 아빠가 현관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거실에서 영혼 없이 짐을 싸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아빠가 발망치를 쿵쾅대며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머, 왜 저러는 거야, 하는데 어마어마한 발망치는 곧장 나에게로 다가왔고, 아빠는 내 머리통을 붙들더니 아직 로션도 덜 마른 자기 볼을 내 볼에다 치대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행복해라,"
"잘 지내라,"
"기쁘게 살자,"
"건강하고,"
"조심히 올라가라,"
젊을 때는 아빠 볼에 수염이 까칠까칠하더니 칠순 넘은 노인네 볼은 참 맨들맨들하더라.
이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누렇게 변한 아빠의 사랑을 쓰고, 보따리에 바리바리 담긴 엄마의 사랑을 챙기고, 문디손들을 태우고, 내리는 비를 뚫고, 다시 나홀로 집으로.
*문디손 네이버 사전 뜻
1. 문디라는 말의 쓰임새는 다양 합니다. 사투리는 딱히 이렇다~ 라고 결론 지을 수없는 표현이 많습니다.
2. 부드럽게 부르면 애칭이 되기도 한다.